11/30/2018
우리는 지난 종교개혁 기념주간에
인류문명의 시작을 스토리텔링의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봤다.
예술이 먼저일까? 종교가 먼저일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대개의 경우 종교가 먼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어 이전에 인류, 호모 사피언스에게는 종교보다 예술행위가 먼저였다.
그때 예술은 지금의 고양된 예술의 형태가 아닌 종족을 보호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수준이었다. 음악 역시 짐승같은 소리를 다같이 질러댐으로 큰 소리로 상대편을 겁주기도 하고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만들어지는 일체감 내지는 단결력으로 생존력을 키울 수 있었다.
미술의 형태 역시 원시부족사회를 유지하는 아마존 인디오나 아프리카 부족에서 볼 수 있듯이 온 몸에 진흙을 바르거나 장식을 몸에 걸치는 것으로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거나 겁을 주어 자신들의 우위를 드러냈을 것이고 동시에 오늘날 제복이 주는 일체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종족보존으로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나중에 등장한 종교의 등장은 종족 보존과 적응수준의 예술을 수직적으로 상승시켜 신적레벨로 Elevation(고양)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소위 범상한 레벨에서 예술은 이제 비범한 세계로 고양되는 차원으로 레벨업된 셈이다. 종교가 사실 그렇게 역할했고 이로인해 인류는 위대한 유산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유럽과 중동의 관광은 사실 이런 유산을 둘러 보는 것이 전부다.
어제 소개한 『마음을 쏘다. 활, -일상을 넘어 비범함에 이르는 길-』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독일 철학자가 일본에서 활쏘기를 배우며 그가 발견한 것도 처음에 단순히 생각했던 활쏘기 궁술에서 일본의 선불교가 궁사들을 고양시킨 비범한 레벨에 이르게 된다.
활을 통해 마음에 등불을 켜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궁술은 육체적 훈련에 머문 무예가 아닌 "궁도"가 된다.
저자 헤리겔은 이것이 단순히 활쏘기에만 해당되지 않고 검술이 검도가 되고
대장장이가 칼에 혼을 집어넣은 깨달음의 경지를 얻고 칼의 대가는 그것을 똑같은 경지에서 느끼고 깨달아 칼을 잡기 전에 대장장이의 깨달음에 예를 표하는 것을 그는 목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역할인 삶의 고양이다.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교회의 벽을 허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제임을 선포한다. 만인제사장설이다.
일본 선불교가 말했던 그런 고양이 유럽에서 먼저 일어난다. 구두를 만드는 이들에게 구두는 신국,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그것을 신을 이웃이, 그리고 동물의 죽음과 가죽의 세계가 다 한곳에 모이는 신국이다. 이것은 맥주를 만드는 이들도, 쇠를 만드는 이들도, 쇠로 기계를 만드는 이들도 다를 바가 없다.
그 시대 만든 건물과 기계, 시계, 가구, 구두, 장신구, 음악을 떠올려 보시라..
우리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 속에 담김 신국의 경이를 우리가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헤리겔 교수의 책 제목처럼 "일상을 넘어 비범함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어야 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종교의 참과 거짓은 그런 열매를 통해 드러난다.
천박함이 아닌 고상함, 일상성을 넘어 비범함으로 나아가는 삶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