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024
가난한 사랑노래
고3, 1년 동안 학교 분위기를 험악하게 조성했지만 사실 나는 공부는 되지 않고 머릿속에 서정만 떠오르면 라디오를 들으며 하룻밤 사이에 시를 수 십 편씩 썼다.
나는 서정을 사랑한다. 아니 사랑, 이라는 말조차 내뱉기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보다 더 고차원의 무엇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까 찾아보았다.
사랑을 각 언어권 별로 찾아보았다.
영어로 하면 러브. 이건 너무 흔하고, 독일어로 하면 리베. 이건 와 닿지가 않고, 이태리어로 하면 띠아모. 이것은 아이스크림 이름 같고, 불어로 하면 주뗌므. 이것은 유아용 브랜드 같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하면 아이(愛). 이것은 우리말 어린아이와 음이 같아 느낌이 안 오고, 라틴어로 하면 아모르. 이것은 화장품 이름과 같고, 그리스어로 하면 아가피. 이것은 오가피 나무와 비슷하여 아니고.....
나는 한참을 생각 끝에 사랑을 거꾸로 발음해 보았다.
랑사.
바로 이거다. 랑사 랑사. 나는 랑사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사랑을 ‘랑사’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고귀한 것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두 번째 ‘랑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온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다시는 ‘랑사’에 빠지지 않으리, 라고 맹세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웃을까. 하지만 그것은 맹세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겉모습만 보고 ‘랑사’에 빠진다는 것이 진정한 ‘랑사’일까, 라는 의문에 대해 첫 번째 ‘랑사’가 5년이 지나도 다 치유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정에게 전화를 할 때는 미리 할 말을 종이에 적어 연습까지 했지만 막상 전화를 하게 되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는 말을 이어갈 수 없어 성급하게 전화를 끊곤 했다.
문학의 밤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처음으로 전화했을 때 서정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서정이 농담을 하거나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문학의 밤에서 게릴라복장으로 시낭송 했던.....”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아는 척 했다. 아, 생각해 보니 나 혼자 서정과 친하다고 생각했지, 서정은 나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문학이 주관성을 강조하듯 문학을 하려면 내 생각이 중요하고 내 식대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나는 주로 밤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정이 직접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른이 받으면 난감했다. 서정의 아버지인 듯 근엄한 목소리로 누구냐고 캐물을 때는 겁이 나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받으면 그냥 끊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학생이잖아. 학생의 본문인 공부해야하지 않아?”
어느 날 서정의 입에서 나온, 어른들이 매일 하는 이 말을 듣고는 짜증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계속 전화하기가 힘들었다.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고 누가 정했어? 공부는 왜 하는데? 대학은 왜 들어가야 하는데? 좋은 대학은 왜 들어가야 하는데? 외치고 싶었지만 모두 다 흰색이라고 할 때 나 혼자 검은색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만 두었다.
하루 종일 눈앞에 서정이 어른거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도 했고 밥맛도 없어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어느 일요일, 이불 쓰고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저녁때쯤 벌떡 일어나 홀린 듯 편지를 썼다. 편지가 시가 되었고 시가 곧 편지가 되었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 풀잎 되어 젖어 있는 / 비애를 /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 돌아올까. 우울한 샹송 - 이수익’
그 시 구절을 떠올리고 우체국에 가보기로 했다. 우체국에 가서 찾고 싶은 사랑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만 번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고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들고 오는데 그것을 부치고 총총히 사라졌다. 대부분 웃고 있었는데 나처럼 고뇌가 가득해 보이는 사람도 가끔은 있었다. 시 구절처럼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지만 공허하여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날 1시간 동안 우체국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자 시에서처럼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그날 찾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가 쓴 글씨를 내가 ‘어두워져서 읽지를 못하게’ 되자 그날은 우체국을 나왔다.
나는 다음날부터 우체국에 가면 사랑을 찾을 수 있는지 하루에 1번씩 우체국에 들러 편지를 부쳐보기로 했다. 그러나 1달을 그렇게 했지만 답장도 오지 않고 우체국에서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문방구에 들러 ‘대학 노트’ 30권을 샀다. 거기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3권 째 노트에 시를 완성한 날, 서정에게 전화를 했다.
“줄게 있어.”
“뭔데?”
“직접 가서 줄게.”
“됐어. 다음에 줘.”
서정은 부드럽게 거부 의사를 표시했지만 나는 내가 직접 쓴 시노트를 주고 싶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든 생각인데 직접 쓴 시를 주고 싶었다.
서정이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춰 서정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너무 일찍 와서 나는 1시간이나 기다렸다.
멀리서 서정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나도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숨긴 나의 몸을 드러냈다. 서정은 나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걸어왔다.
“진짜 오랜만이야.”
상투적인 인사는 하지 않으리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상투적인 인사가 나왔다. ‘세상이 멸망한 줄 알았어.’, ‘지구가 자전하듯 다시 보네.’ 이런 말보다는 자연스러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를 꺼냈다. 노트를 꺼낼 때 1년 전에 본 찢어진 시험지도 같이 나올 것 같아 조심하며 재빨리 꺼내서 서정에게 건넸다.
서정이 노트를 받아들고 펼치려고 할 때 갑자기 어디선가 읽은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강하게 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 심지어는 강제로 키스를 하는 것도 효과가 있다.’
어느 대학생의 체험담은 이렇다.
여러 여자를 꼬신 적이 있는데 외국 모델부터 할머니까지 치마만 두르면 다 자신 있게 공략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고3 여학생을 처음 보았는데 한 눈에 반하게 되어 갑자기 키스를 하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여자애한테 전화가 와서는 오히려 만나자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는 순간, 서정의 입술이 레몬 껍질처럼 보였다. 은은한 달빛에 배어나온 레몬향기가 코끝에 스치는 듯 했다.
서정은 노트를 펼치더니 첫 장을 읽고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 놀랄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놀라다니 의외였다. 그 문장은 이렇다.
너의 심장을 꺼내 내 심장과 갈아 끼우고 싶다.
서정의 얼굴이 빨개졌을 때 나는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고 나도 모르게 서정에게 달려들어 서정의 입술을 덥석 머금었다.
“악”
아주 짧은 순간, 서정은 입술을 꽉 다물며 뒤로 물러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기겁을 하며 소리를 치니 내가 더 놀라고 민망했다.
“랑사해.”
노트가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소리 질렀다.
“뭐?”
“랑사 한다구. 나는 너의 특징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존재를 랑사해.”
“이상해. 미쳤나 봐.”
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서정은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랑사 한다구.”
나는 땅에 떨어진 노트를 집어 서정에게 전달하려고 따라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에 섰을 때 서정에게 노트를 다시 건넸다. 서정은 내가 주는 노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랑사해.”
“이런 거 필요 없어. 말도 이상하게 하고…….”
노트는 흙이 묻어 더러워졌고 낭자하게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느낌이었다. 노트가 불쌍해 보였다. 그것을 쓴 내가 처참한 느낌이 들었다.
모멸감. 그 순간 든 기분은 모멸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받기 싫다고 하면 그냥 주워서 오면 될 것인데 나를 거부했다는 그 사실을 넘어 더 큰 어떤 것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오기가 생겼다. 나의 입술을 거부했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의 세계를 거부하고 나의 시를 땅에 집어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은 이미 유리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문이 잠겼다.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단지 내 시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생각, 어떻게든지 노트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흥분상태였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답답했고 안타까웠다.
그 때 개 짖는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유리는 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에서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어도, 군인 복장을 하고 사냥개를 끌고 온 서정의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찰서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어 나는 개에 대한 공포감이 있는데 커다란 세퍼트가 무섭게 짖으니 나는 극심한 공포에 오줌을 쌀 뻔 했다. 세퍼트가 달려와 나의 성기를 물것만 같아 나는 비명을 지르고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고 미친 듯이 유리를 깨부쉈다.
경찰서까지 갈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서정의 아버지는 끝내 나를 경찰서에 넘겼다.
12시가 다 되었지만 경찰서는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고 있었고 손님들을 맞을 준비하는 가게처럼 분주했다.
“왜 그랬어?”
담당 경찰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랑사 해서 그랬어요.”
“똑바로 말해 봐. 장난치지 말고.”
“랑사 해서 그랬다구요.”
“랑사가 도대체 뭐야.”
“랑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검정이예요.”
경찰서에서 ‘랑사’, 라는 단어를 놓고 입씨름 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랑사’를 사랑, 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랑사’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이미 ‘랑사’가 아니고 그냥 사랑이고 내가 말하는 ‘랑사’는 사랑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랑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려면 스스로 느껴야 한다. 경찰관들은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꽉 막혀있었다.
그때 저 쪽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앉아있던,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랑사는 사랑이네.”
그러자 개그맨처럼 시시덕거리던 경찰이 비아냥거렸다.
“사랑이 랑사면 키스는 스키고 석방은 방석이냐.”
중학생 아이는 와, 킥킥킥 웃으며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단순하게 거꾸로 해서 말을 바꾼다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스가 스키가 되는 것은 괜찮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미끄러지듯 키스할 수 있으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언어로 제대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느꼈다. 시인의 손을 떠난 말의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라지만 이렇게 큰 소동이 벌어질 정도로 전달이 안 되면 이것은 예술이기 이전에 고통이다.
예술은 일상에서는 어렵고 통용되기 힘든 박물관의 전시물인가. 혼자서 종이에만 써야하고 그 암호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끼리 돌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언어 너머의 세계는 무엇일까. 육체일까, 전쟁일까, 종교일까.
연락받은 엄마가 달려와서 울며불며 사정하자 경찰은 선심 쓰듯 말했다.
“학생이고 초범이고 피해자도 처벌까지는 원하지 않으니 반성문 쓰고 돌아가.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진짜 벌 받을 거야.”
처참한 마음으로 집을 행해 오면서 나는 단지 중얼거릴 뿐이었다.
‘랑사해 랑사해랑사해랑 사랑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 한다고 사랑 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
시의 뒷부분,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은 이 시에서의 정서와 다른 울음이지만 전제적으로 이 시의 감정이 내 감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3일 동안 아무 것도 안 먹고 이불 쓰고 누워서 끙끙 앓았다. 엄마는 에구, 한숨만 쉬며 약을 사다 주셨지만 나는 그것을 먹는다고 낫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3일 후에 겨우 일어나 서정의 거부로 인한 충격과 괴로움은 주로 책상에 앉아서 풀었다. 노트 첫 장에 한서정의 이름을 크게 써놓고 다음 페이지부터 제목을 한서정이라고 쓰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노트 가득 한서정의 이름을 가득 써넣기도 하고 서정과 만나서 하고 싶은 가상의 대화를 가득 써 넣었다. 다 써놓고 보니 시나리오처럼 보였다. 시나리오처럼 보인 것이 5편 정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으며 한 달 간 쓴 시가 300 편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실연의 상처를 담은 노래만 귀에 들어왔다. 특히 이용복의 ‘줄리아’는 애절하여 마음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사랑 줄리~~~~아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여인아... 마지막 남은 나의 웃음마저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여인아~~ 꿈에도 못 잊을 여인아 줄리아~~
소설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