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1868∼1925) 선교사가 1907년 광주 개신교의 출발지인 남구 양림동에 세운 ‘숭일학원’이 전신으로 1908년 4년제 소학교인 ‘숭일보통학교’로 개편됐다. 1909년에는 2년제 고등소학교가 설치되었다. 학생과 교사의 독립운동 참여,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45년 11월 21일 6년제 중학교로 복교되었다.
* 숭일(崇一)이라는 교명은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뜻이다. 성서적인 교육이념에 따라서 참된 인간 교육을 구현하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설립정신에 부응하여 당시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한 최득의 선생이 지었다. 최득의, 남궁혁, 홍우종 선생 등이 초창기 교사로 헌신하였다.
* 1951년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
로 개편되었으며, 1997년 3월 1일 남녀공학으로 변경되었다. 1993년 5월 3일 일곡동으로 신축교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 숭일은 기독교 교육과 더불어 철저한 민족주의 정신을 불어 넣어서 후일 이 지역 항일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모체가 된 것은 광주숭일학생YMCA였다. 당시 숭일학교 고등부 학생들인 최영욱, 조정환, 최기현, 정효룡, 장맹섭 등의 주도로 이승만 박사가 광주를 다녀간 후인 1911년 발족되었다. 숭일 YMCA는 결국 광주YMCA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오늘의 광주정신을 대변하는 사회단체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단체의 모태 역할을 한 것은 숭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 숭일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주도했던 광주의 3.1 운동은 장성, 나주 등지로 확산되면서 민중들의 거센 독립의 물결은 열화와 같이 번져 나갔다. 숭일학교 교사 2명과 학생 27명이 광주 지법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대구고법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이들 중 송광춘 학생은 대구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중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사하였으며, 그 시신은 숭일학우 전교생의 통곡속에 송정리역에서 학교까지 운송되어 학교 안에 안치했으나, 뒷일을 두려워한 일본 경찰들이 장례식 전야에 시신을 훔쳐다가 몰래 매장해 버렸기 때문에 그 뼈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 숭일중고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됐다가 광복 후 다시 문을 열고 1951년 현재와 같은 3년제 중고교로 자리 잡았다.
* 6.25 전쟁 당시 숭일은 희생자를 많이 냈다. 당시 5학년이었던 박원택 학생은 가족과 함께 영암에서 순교했으며, 6학년이었던 박금규, 장창균, 박창혁, 김창규 등 다수의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 숭일고 출신으로 한국인으로서는 맨 처음 미국에서 의학박사가 된 최영욱(해방 후 군정 때 전남 도지사), 조정환(해방 후 외무부 장관), 숭실대 교수이고 시인이셨던 다형 김현승 선생, 다수의 교역자들, 의사, 정치인 등을 배출하였다. 군인 장성으로는 조영길 합참의장이 있다. 3.1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최병준 선생을 비롯하여 정두범, 주형옥, 옥사한 송광준씨 등이 있다.
* 중국 혁명음악가 정율성(1919∼1976)
정율성 선생은 광주(光州) 출생으로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옌안[延安]의 루쉰[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서 정식 비준을 받았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 ·가극 ·영화음악분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