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해설서 - 나는 무었인가?

금강경 해설서 - 나는 무었인가? 금강경에 대한 이해를 위한 페이지

24/06/2016

1. 法會因由分 법회인유분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
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오 십 인 구 이 시 세 존 식 시 착 의 지 발 입 사 위 대 성 걸 식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洗足已 敷座 而坐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세족이 부좌 이좌.

일분의 총체적인 의미는 육하원칙에 의한 이 금강경이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라는 것을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 한문 원본을 기록하는 이유는 한글로는 도저히 의미를 담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기에 한문 원본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한자라는 특성을 이해하고 경전을 본다면 더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한 일(一)이라 보통 일반적으로 발음하고 숫자적인 개념으로 많이 통용됩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한 글자 한문 속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숫자적인 개념으로 하나 둘 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첫번째 일, 제 일, 오로지 일, 같을 일, 동일하다, 온 일, 온통 일, 혹시 일, 만일 일이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한자라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다른 예로 밥 식(食)이라고 간단하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이 문자의 전후 의미 즉, 전후에 어떤 문자가 오느냐에 따라서 의미는 변합니다. 본문 중에 걸 식과 반사 흘이란 단어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는 식으로 표현하고 어디에서는 사로 발음 표현됩니다. 그러니 한자란 문자는 어렵기도 하지만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경전을 보아야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자에 매달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자는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입니다. 이정표를 바르게 보아야 목적지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자가 가르키는 목적지는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길이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같은 길이 아니라 바다 위나 허공을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정표를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이정표에 집착하여 목적지를 보지 못하고 이정표에 맴도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서는 안 되겠지요.
금강경 제 일분 법회인유 속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먼저 소제목 법회인유(法會因由)란 의미는 이러합니다. 백년천년을 두고도 서로 만나서 친밀하게 반가운 사람들이 붓다를 보고, 발견하고 하는 연유, 인연이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보통은 법회가 열리는 인연이라 해석하는데 잘 관찰하여 보세요. 그럼 보일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 소제목은 붓다가 말하여 붙인 제목이 아니라 금강경이란 기록물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이글을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문장이란 사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어느 기록에는 금강경 원전이 27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언제 누군가 모르는 사이에 5분을 더 추가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기록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금강경 전체 내용을 잘 관찰하면 삼십이분이란 구색을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5분은 붓다, 스승의 육성이 아닌 기록자들의 교묘한 추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27분을 32분으로 하였는가? 여기에는 참으로 미묘한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붓다 여래의 삼십이지상 즉, 신체적인 삼십이 특징을 내포하고 숭배 추앙하기 위하여 삼십이분으로 작성 기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금강경 전체내용을 잘 관찰하면 보입니다. 소제목 삼십이분이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본문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제목들도 여러개 나타납니다. 앞으로 그 부분을 살펴볼 것입니다.
제일 법회인유분 내용은 이러합니다.
금강경이 탄생하는 환경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인류 인간 마음 정신세계 최고 경지를 기록하는 기록물에서 장황하게 그 환경 현상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대 그 지역 환경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 어떤 사람과 누가 어떤 삶속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그 말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으며 그 환경, 장소, 사람들에 대한 모습만 보아도 그들에 마음 가치관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어부는 바다와 고기에 대하여 잘 알고 가치관이 오직 바다와 고기에 대한 이해로 마음 가득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지배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가치관을 만들어 마음을 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치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금강경 제 일분 법회인유분 기록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육하원칙 같은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問)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록자들의 완전한 오기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세계 최초로 올바르게 제가 해석을 할 것입니다. 불교의 많은 경전 첫 머리에 대부분‘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고 기록되고 시작합니다. 왜, 경전 기록 첫 머리에 이렇게 기록되었는가 보다도 잘못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바르게 기록하여야 합니다.
여시아견문(如是我見問)‘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볼 견, 보았다는 것을 첨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 내용이 진실 되고 올바른 권위가 살아납니다. 자~ 관찰하여 봅시다.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은 아난존자의 구술로 기록되어집니다. 아난존자는 붓다의 시봉자로 항상 그 옆에서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일분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면 부족하고 잘못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하여야 올바른 기록이고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불교의 많은 경전 첫머리에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기록되었는가? 이렇게 말하고 기록되어야 올바르지 않는가? 붓다,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하고 기록하여야 올바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들었다 왜?‘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기록하였는가?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내재합니다. 아난존자 본인은 붓다, 스승의 말을 듣고 보았으나 붓다가 의미하는 의도를 자신이 잘못 듣거나 오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확정이 아니라 가정을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붓다, 스승이 한 말씀 중에 자신도 모르게 어떤 생각 단어를 첨삭 내지 분실하여 내용과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붓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는 확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가정을 먼저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하는 내용 속에는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들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불교의 많은 경전 첫머리를 고쳐야할 것입니다.‘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새로운 사실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맹점을 가지는 것이 큰 병입니다.‘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 여시아견문이라 하시라.
금강경 첫머리 [여시아견문]‘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는 이러합니다. 아난존자 본인이 보고 들은 것 중에 가장 골수와 영혼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모습과 말을 의미합니다.
아난존자 세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잊혀지지 않고 지울 수도 없는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반이자 선배이고 가장 가까웠던 수보제의 폭발적인 울음입니다.
제 십사분에 나오는 [심해의취 체루비읍]을 아난존자는 보고 수보제 전후 사정을 보고 듣고 하였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 시켜주자면 그날 수보제가 울던 모습은 아니, 울었던 울음은 개인의 울음이 아니라 인류 전체 인간의 울음이었습니다. 하늘, 땅, 공기, 빛과 어둠, 물, 불, 모든 존재의 진동이요. 꽃피어남이었습니다. 그 날에 모습은 이러합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많은 시간 수보제와 붓다 그리고 많은 제자 무리들이 일년 이년이 아니라 수십년 자신의 마음을 보고 이해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탐구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도박 같은 수행 탐구가 매일 이어졌습니다.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해가 뜨나 밤이고 낮이고 살아 숨 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을 보기 위하여 스승, 붓다를 중심으로 일체를 이루어 시간, 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서로 모두가 숨소리 눈동자 하나 움직임도 예의주시하며 매 공간 시간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더 없는 서로에 존경, 기쁨, 감사로 너의 것 나의 것이 없는 공동 운명체적인 상황이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보제가 질문하고 많은 대중이 주의 깊게 함께 보고 듣는 순간에 기적 같은 이변이 신비스럽게 일어납니다.
수보제 나이 약 65세 전후로 노인이 되어 흰 머리카락과 수염을 드리운 건장한 노인이 철없는 어린아이가 울듯, 부모 잃은 자식이 통곡하듯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애인이 죽어 떠난 것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의 눈물을 대변하듯 주변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 같이하여 눈물은 폭포수 같이 흘러내려 바다를 이루고 온 몸은 시체처럼 굳어지고 입에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흐느낌과 폭발의 불기운이 퍼져 나오고 심장은 멈출 것 같고 콧구멍으로는 숨이 공기가 들어가는지 나오는지 느껴지지도 않고 주변의 모든 형상들은 과거의 형상이 아니고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존재감마져 사라지고 오로지 감당할 수 없는 크나 큰 기쁨만이 감도는 그 순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울음이 얼마라고 시간을 말할 수 없는 동안 눈물의 바다를 이룹니다.
이 눈물은 아누다라삼막삼보제라는 비존재의 보물로부터 샘솟는 진리의 표현이요, 궁극을 보았다는 증거의 표출이 샘솟아 우주의 별 은하수같이 영원히 빛나는 별이고 감로수와 같이 온 몸을 적시고 모든 존재들의 고향 근원의 바다에서 흘러넘치는 법비요, 아누다라삼막삼보제의 향기였습니다.
이 날에 수보제의 눈물, [심해의취 체루비읍]이 없었다면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은 이 지구상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며 불교라는 종교도 다른색의 형태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이 날에 수보리의 울음, 눈물은 아난존자 홀로 본 것이 아니라 1250명을 포함한 붓다와 시간 공간이 함께하였다.그 날의 그 충격이 아난존자의 가슴과 영혼 골수 속에 스며들어 있던 것이 붓다가 떠난 뒤 아난존자의 입을 통하여 재현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이란, 이 수보제의 울음 눈물을 기준으로 하여 왜 그렇게 울며 눈물을 한 없이 흘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울음 뒤에는 어떻게 무엇이 변하여 갔는가를 기록한 문헌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는 인연들이여, 부디 문장과 문자에 속지마시고 그날 수보제가 흘렸던 눈물바다에 뛰어들어 함께 울어 보시요. 망설이지 말고, 두려워 말고, 주변을 살피지도 말고, 오로지 자신 홀로 속에서 수보제 울음 눈물을 먹고 마시고 흡수하고 함께 울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것을 자르고 포기하여 보라.
온 몸의 힘을 버려 보시라. 눈동자의 움직임 호흡의 들숨, 날숨마져 놓고 그냥 정신없이 지켜보라. 지켜보라. 이것이 금강경 시작의 여시아견문의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왜 수보제가 울게 되었는지 설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일시(一時) 이 부분의 올바른 이해는 이러합니다.
어느 때에 하고, 세계 불교 학자와 승려들은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55년전 사계절 중 봄 어느 날 오전에 붓다와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장소는 인도 코살라 국 슈바라스티라는 도시이고 그 도시는 인구가 구십만 호이며 구십만 호란 가구 수로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인구수 조사와 다르며 그때에는 개인 개인 인구 수 보다는 가구수를 가지고 인구수를 측정하였답니다.
그럼 한 가구당 가족 수는 지금과 같은 소가족이 아니라 대가족 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한 가구당 가족 수를 8~15명 정도로 추산한다면 얼마나 되는 인구가 거주하였을까요? 대단히 거대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서 붓다님은 25년을 거주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번역자 삼장법사는 왜, 이런 표현으로 번역하였는지 많은 의문이 듭니다. 위국이란 바로 코살라라는 나라고 수급고독원이란 슈바라스티라는 도시 속 사원 기원정사를 의미하며 조용하고 고요한 사원, 절 그곳에서 이 금강경 내용이 설하여 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본 이 부분 설명은 이러합니다.
슈바라스티라는 아주 큰 도시 주변에 수풀이 울창하고 꽃과 동물 자연이 풍요로우며 맑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먹고, 자고, 입고 하는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룬 그런 도시와 아름다운 정원 같은 곳에 있는 절 사원, 기원정사라는 곳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與大比丘衆 千二百 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
여대비구중 천이백 오십인 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
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洗足已
대성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 본처 반사흘 수의발세족이
敷座 而坐 』
부좌 이좌
이것이 일분 내용인데,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붓다와 그곳에 참석한 인원 구성과 매일 생활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아난존자는 이런 환경을 금강경 첫 머리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가 그 사람들의 마음 내면세계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두고 가정을 꾸리고 좋은 집, 맛있는 음식, 좋은 옷, 많은 귀금속, 보물을 얻고 타인들에게 자신을 과시, 자랑하고 잘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여 인정받고 박수받고 추앙받고 많은 재물과 명예를 얻으려는 교활한 계산된 생활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고 탐구하며 서로가 참으로 귀히 여기며 일심일체의 공동체 같은 모습을 설명하므로 금강경 본문을 이해하는 또 다른 설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와 그 제자 그리고 함께하였던 많은 무리들이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봄으로써 내면세계에 또 다른 안목을 열 수 있으며 자신내면 탐구 여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는 각자 개인 내면의 보이지 않는 그 밧줄과 그물을 자르고 밝고 밝은 눈으로 자신의 본성을 보고 이해하는데 또 다른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보겠습니다.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 俱』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 구
많은 비구와 대중 천이백오십 명이 함께 동참하였다. 이 의미를 더 자세히 관찰하면 붓다와 거기 참석한 인원수와 사람들에 부류 즉,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떻게 참여하여 함께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참여한다는 의미는 몸만 거기에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자 몸속 또는 머릿속의 모든 마음을 관찰하고 탐구하기 위한 대단한 결심을 한 마음의 상태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비구중(大比丘衆) 여기서 한자로 대(大) 이 글자 속 의미를 잘 보아 야 하는데 부피적인 형상적인 측면으로는 크다는 의미를 지니는 글자로 일반적으로 의미를 본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한자 대(大) 이 글자를 크다는 수량적인 측면도 있지만 대강 대(槩,대개 개, 내면세계를 함께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비구중(比丘衆), 이 단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비구라는 단어와 중이란 단어 두 개로 볼 수도 있고 세 글자를 한단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먼저 비구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구(比丘)란 인도어로 비쿠 즉,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고자 일반적인 삶, 재물, 명예, 가족과 가정을 이루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고자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불교 승려 그것도 남자 승려를 비구라고 한다고 이해하는데 부족한 이해입니다. 인도의 다른 종교 즉,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도 비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 한자 비구라는 문자 속 의미는 무엇인가? 비(比), 이 한자 속 의미는 견줄 비, 비례 비, 무리 비, 나란히 할 비라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서로 견주어 예리하게 지켜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 다음 구(丘), 언덕 구, 무덤 구라는 의미의 한자인데 시체처럼 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삼장법사가 의미를 부여하여 인도 비쿠라는 단어 의미를 이렇게 만들었다. 여러 무리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항상 시체처럼 지켜보는 자라는 의미를 만들어 번역하였다.
또한 인도에서는 가정을 버리고 떠돌면서 거지처럼 얻어먹고 살아가는 자를 비쿠라 하기도 한다. 단 수행하면서 떠도는 자를 의미한다. 그럼 여대비구라는 단어 속 의미는 여기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견주어 비교하면서 각자 내면세계를 항상 시체처럼 고요히 지켜보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중(衆), 무리 중, 많을 중이란 의미의 문자인데 일반적으로는 정확한 인원수를 알 수 없는 비교적인 측면의 인구수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 글자 자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글자 자원 의(議)는 이러합니다. 많은 사람 군중 무리가 눈으로 한 곳을 응시, 주시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닙다. 여기서 눈은 육안의 두 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대비구중이란 실체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로지 자신의 내면 탐구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천이백오십인이란 사람 수가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이러합니다. 아난존자가 그날 사람 수를 한명한명 체크한 것이 아니라 매일 펼쳐지는 설법과 명상 장소는 건물 내부이며 그 건물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자리수가 1250개 좌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외가 아니라 기원정사라는 사원 건물 내부에서 이날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좌석 배치는 가운데 붓다님이 앉고 그 주변으로 1250개의 자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붓다의 설법을 보고 들을 수 있기에 한번 상상해 보시라.
1250명 정도의 사람이 한사람의 말을 경청하고자 한다면 어떤 형태로 앉아야 서로 잘 보고 잘 들을 수 있겠는가? 영화관의 자리 배치처럼 원형의 돔을 이룬 형태가 가장 좋은 자리 배치일 것입니다. 또한 여기 참석 인원은 이러합니다.
1250명은 출가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지금 학교와 같이 집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기에 기거하면서 붓다와 함께한 인원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화경 같은 기록을 보면 수만 명 즉, 팔만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출가자 권속 즉, 출가한 사람을 따라온 가족 추종자들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에서 1250명이란, 의미는 오로지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는 인원을 의미합니다. 다음 구(俱), 이 문자 속 의미는 1250명 모두가 그곳에서 명상 수행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갖추고 함께 참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도구란 각자 밥그릇 즉, 바루와 옷 먹고 자는 것과 세면 목욕할 수 있는 도구를 각자 갖추어서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출가하여 그곳에 온 사람에게 기원정사 절에서 그런 도구를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참 준비하여 참가해 생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시(爾時)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매일 생활하는 중에 세존(世尊) 식시(食時) 착의지발(着衣持鉢), 밤이 가고 아침이 열려 아침 식사할 때가 되어 부처님도 손수 여러 사람과 함께 옷을 가지런히 하고 나무로 만든 밥그릇과 쇠로 만든 밥그릇을 손수 각자 지참하고 기원정사를 출발하여 많은 사람이 살고있는 성,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地本處 飯食訖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한집 한집 차례로 먹을 음식을 구걸하여 출발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와 여럿이 함께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섭취하기를 마치시었다. 그러고 는 밥그릇을 세척하여 잘 정돈한 뒤 입었던 옷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세면장에 들어가서 목욕 재개하고 큰 강단 설법 장소에 들어가서 모두가 지정된 자리에서 고요히 명상에 들었다.
[부좌이좌]란, 자리를 펴고 집 안 즉, 건물 안에 고요히 좌정하고 말을하고 들을 준비를 서로 하여 명상적인 상태로 연화좌로 앉아있었다. 왜 이런 장면을 아난은 구술하고 있는 것일까?
그날 수보제가 울었던 그 순간을 이해 하는데는 이런 세세한 전후 사정의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수보제 제자의 폭발이 일어났던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모습을 연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수보제의 폭발적인 울음을 느끼고 우리도 수보제가 보았던 것을 볼 수 있고 폭발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말고 즐거운 마음에 여행이라 여기고 이 글을 본다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붓다와 수보제 아난존자의 기운과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는 여행을 즐겨야 합니다. 지구 인류에서 가장 높게 비상한 인물 그분의 가르침과 수보제의 눈물을 이해하고 보고 알려면 우리도 그분들의 작은 생활모습도 관찰하여 그 분들의 가르침을 이해,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수보제의 눈물바다 마음의 폭발이 이루어지게 되는 원인은 이런 환경과 생활 속에서 점차적으로 에너지가 축척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작은 일들도 조용한 마음으로 미세하게 관찰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 또는 개안, 성불, 득도, 발견아누다라삼막삼보제라는 것을 대중이 보고 스승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이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보제의 울음이 최초이고 마지막입니다. 여타 다른 깨달은 제자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공개되지 않은 시간,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수보제는 스승, 붓다와의 대화 즉, 질문과 답변 속에서 스승이 지켜보고 1250명이란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득도, 해탈, 깨달음,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게 되는 참으로 신비하고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깨달음을 얻은 각자들이 있지만 이렇게 붓다,스승이 지켜보고 인증하고 증명하여 주고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수보제 제자뿐이며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이 소중하고 귀중하며 또한 아난존자가 구술하게 되고 기록되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그런 수보제의 울음 폭발이 이루어지기 전과 이루어진 후의 과정을 이해하므로 그 수보제 폭발의 경험을 공유하고 모두가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지표요, 증거가 되므로 우리는 그 분이 살았던 장소 생활하였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아름다운 영혼의 여행이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시간은 제가 먼저 2555년 전 어느 봄날 오전이라 알려드렸습니다. 장소는 인도 코살라국이란 나라의 슈바라스티는 영광의 도시이며 그 아름다운 정원같은 아주 좋은 명당의 거주지에 집을 지어놓고 어떻게 어떤 사람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참으로 재미난 여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 각자 그림을 한번 그려 보세요.
붓다와 1250명이란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집들과 주변 모습을 그들이 거주하던 집을 기원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절 또는 사원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먹고 자고 생활하는 공간 건물이였습니다.
그 건물은 바로 금강경에 등장하는 붓다 제자 수보제라는 분의 육촌형님이라는 혈족이 설계하고 건축하여 여럿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이용하는 건물, 건축이라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건축물 중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답게 건축된 건물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먼저, 그 건축물 전체 구조는 환기가 잘되고 생활하기 가장 편한 구조로 건축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대시설로 화장실, 세면장, 주방, 세탁소 등이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부처님도 먹고 자고 말하고 숨쉬고 살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수보제와 아난존자와 약 1250명이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던 것이지요. 개인 붓다에게 다가서면 그분이 입은 옷과 먹는 밥그릇 그리고 잠자리 이불 베개도 살펴볼 수 있겠지요. 더 가까이 가면 그분의 몸도 볼 수가 있지요. 그럼 오늘 그분의 몸 육체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과거 기록물을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체적 특징 내지 육체 전체를 기록한 부분을 [삼십이지상]이라 부르는데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혹, 이 글을 보고 저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마시고 인내하시고 금강경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판단하시길 권합니다.

삼십이지상, 이 부분은 동국역경원 발행 불교용어 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부처님 성기까지 너무나 잘 기록 되었는데 부처님 항문의 기록은 없습니다. 발바닥부터 시작됩니다.

1.발바닥이 판판함
2.손바닥에 수레바퀴 같은 무늬가 있음
3.손가락이 가늘면서 길다
4.손발이 매우 부드러움
5.손가락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비단결 같은 막이 있음 6.발꿈치가 원만함
7.발등이 높고 원만함
8.장단지가 사슴 다리 같음
9.팔을 펴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감
10.남근 즉 자지가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이 말
자지 같음
11.털구멍마다 새까만 털이 남
12.키가 두 팔을 벌린 길이와 같음
13.몸의 털이 위로 쓸려남
14.온몸 빛이 황금색임
15.몸에서 솟는 광명이 한길 됨
16.살결이 보드랍고 매끄러움
17.두 발바닥, 두 손바닥, 두 어깨, 정수리가 모두 판판하고 둥글며 두터움
18.두 겨드랑이가 편편함
19.몸매가 사자와 같음
20.몸이 곧고 단정함
21.양 어깨가 둥글며 두둑함
22.치아 수가 40개 임
23.치아가 가지런하고 빽빽함
24.송곳니가 희고 큼
25.뺨이 사자것과 같음
26.목구멍에서 맛 좋은 진액이 나옴
27.혀가 길고 넓음
28.목 소리가 맑고 멀리 들림
29.눈동자가 검푸름
30.속눈썹이 소의 것과 같음
31.두 눈썹 사이에 흰털이 남
32.정수리에 살 상투가 있음.

이것이 붓다라는 분의 육제적인 부분을 기록한 삼십이상 또는 삼십이지상이란 기록인데, 모든 육체적인 구멍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중요한 귀 구멍 속과 똥구멍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붓다의 항문은 어떠했는지 정말 궁금한데 똥을 잘 싸야 잘 산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싸는 일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 금강경, 이 기록물은 지금으로부터 2555년전 어느 봄날 오전 약 2~4시간 사이에 탄생하는 신비와 기적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붓다와 제자 수보제라는 두 분 사이에서 지구 위 인류의 시작과 끝을 단 2~4 시간이란 동안 완전하게 설명하고 표현한 인류 최고의 문헌입니다.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떻게 지구 위 인류의 모든 것을 단 2~4시간 동안 논술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음으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그날 그 일이 일어난 것에는 수보제의 많은 과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날 2~4시간이 존재하기 위하여 수보제와 붓다가 수십년 함께 생활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물 내용을 체득 내지 이해하는데 몇 수십년이 걸려도 혼자서는 이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붓다님과 제자 수보제 두 분은 단 몇 시간만에 완성한 것입니다. 아마도 인류의 기적 중 이보다 더한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단 몇 시간만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이 금강경이란 내용이 탄생하기까지는 붓다와 수보제 인생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두분에 인생이란 전생 즉, 금강경이 탄생하는 그 시간에 육체를 유지하기 전의 전생도 포함되는 인생입니다. 비록, 단 하루에 탄생하는 기록물이지만 금강경이 탄생하기까지 두 분을 매체로 인류의 모든 영적인 측면이 함축된 매체들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두분이 지구와 우주의 모든 과거를 담고 있는 매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금강경이란 내용을 글로 읽고 말로 소리 내어 행할 수 있지만 말과 글 넘어 의미 실체를 체득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평생 내지 수십 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 모두는 각자 하기 나름입니다. 한 예로 달마대사로부터 여섯 번째 법맥을 전수받은 제자 혜능이란 분은 약관의 나이 23세에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더벅머리 총각 나무꾼에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미천하게 생활하고 살아가던 어린 청년이 이 금강경 단,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주]라는 소리를 듣고 금강경 전체 내용을 체득했다는 것을 증명으로 본다면 참으로 묘한 것일 뿐입니다.

이 글을 보는 님들은 그 무지한 나무꾼 보다는 더 지성적이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더 발전된 현대 문명 속에 살고있는 더 성숙된 사람들이 아닐까요? 중국의 선사 혜능보다는 더욱 좋은 여건 성숙된 시대 현대에 살고 있으며 혜능이란 무지한 나무꾼이 보았던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신비가 님의 궁전 앞에서 속삭이고 있네요. 오늘 이 순간에 님을 유혹하고 이끌고 있네요. 저 넘어 세계로...
금강경 속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핵심입니다. 가정, 부모형제, 친구, 사회, 국가, 이웃, 남자, 여자, 도덕, 예의, 선과 악, 죄와 벌, 천당 ,극락, 지옥, 부자, 가난함, 명예, 권력, 숭배, 믿음, 불행, 행복, 축복, 공덕, 복덕, 깨달음, 영혼, 죽음이 없다. 부처를 믿고 따르라는 것도 없다.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자신을 보는 방법과 과정과 결과, 자기 주시, 자기응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하라.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넘어 마음속을 보라 그 중에서도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생각느낌, 나라는 생각느낌, 나는 사람이라는 생각 나는 많은 사람중의 한사람이다라는 생각, 나는 지금 숨 쉬고 살아있고 미래에도 숨쉬고 살다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하는 마음을 주시하라. 보는 자를 보라만 있다.
문자는 미묘한 도구입니다. 또한 짐을 나르는 수레이기도 하고 보는 자를 알고보고 하려면 보는 행위와 과정을 보아야 하는데 즉, 관찰 주시를 하려면 어떤 것이 올바른 관찰이고 주시인지 보고 알아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여러 문자가 있지만, 본인이 이해하기로는 한자만큼 깊고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문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외부의 사물을 표현하는 것보다 내면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볼 관(觀), 볼 람(覽)의 차이점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관(觀), 이 글자 속 의미는 이러합니다. 물론 문법적 해석이나 학자적 입장에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저는 각자 개인의 내면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중심을 두고 볼 것입니다.
관(觀), 이 글자는 사람 내면의 마음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문자입니다.
각자 개인 머릿속 즉, 이마 속에서 작은 새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잡념 마음 조각들을 자신의 내면의 또 다른 눈으로 조용히 본다. 즉 작은 잡념을 꼬리 작은 새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새들이 숲에 숨어서 울고 있는데 그 새를 보려면 조용히 아주 천천히 숨죽이고 자세히 관찰하여야 그 새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나면 새는 날아가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자신의 마음 조각들을 보는 과정에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입니다.
다음 볼 람(覽), 이것도 눈으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인데 이 문자 속 의미는 인간 개인 내면이 아니라 외부를 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람(覽), 이 문자 속 의미는 이러합니다. 파자하여 살펴보면 감(監), 볼 감, 살필 감, 비추어볼 감, 거울삼을 감, 감찰 감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글자 자원은 쟁반에 물을 부어놓고 그 수면을 거울삼아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자신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볼 람(覽)이란 문자 속 의미는 비유적으로 거울에 비추어 본다. 또는 비교하여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관(觀), 람(覽) 이 두 글자 모두 본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분명히 다른 각도에서 본다는 의미를 지니는 문자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을 이해하고 보려면 바로 관(觀)의 의미로 자신을 보아야 금강경 내용을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횡설수설 막작시념 막지어서 생각하고 막작시설 막지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영광의 도시 슈바라스티라는 도시의 기원정사라는 공동체 속의 하루아침이 열립니다. 사람 부처도 먹어야 살기에 먹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공동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 살았는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나 어떤 일을 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거지처럼 단체로 부처와 제자 모두가 깡통 밥그릇을 들고 얻어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자급자족하지 않고 걸식 즉, 거지처럼 얻어먹었는가? 많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또한 부분 부처님 본인도 깡통바루를 들고 거지처럼 밥을 얻으러 걸어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겠지요.
만약에 한국에서 제일 큰 절의 주지나 조실 방장을 보고 깡통들고 밥어먹고 살라하면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찌되었든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옷을 가지런히 하고 1250명이 단체로 밥을 얻으러 마을로 들어가서 한집한집 차례로 음식을 빌어 그 집이나 도중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로 돌아와 단체로 같이 식사를 하고 밥그릇과 자리를 정리하고 세면과 손발등 목욕을 하고 모두가 자리를 펴고 부처님은 가운데 앉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모두가 고요히 명상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발을 닦았다하는 부분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온 몸을 목욕하였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발을 씻었다하는 세족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인도에서는 과거나 지금도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가르침을 정중히 받아들인다는 의미 나는 모르고 님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스승의 두 발에 이마 얼굴을 대거나 두 손으로 어루만지므로 귀의와 복종을 의미하는 하나의 예의요, 가르침을 청하는 정중한 표현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렇게 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발을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두 발로 땅을 걸어 다니면서 먼지 묻은 발을 내어 주는 것이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여겨 발을 깨끗하게 닦고 맨발을 내어 얼굴을 대거나 두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여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례는 지금도 인도에는 존재하는 관례입니다. 다른 불교 국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관례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수보제님과 붓다님의 보이지 않는 레이저 광선이 서로에 혼을 비출 것입니다. 두분 사이에 오고 가는 빛이 번개나 벼락보다도 더한 충격, 도끼나 칼, 총, 화살, 핵, 미사일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 교류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조용한 눈으로 본다면 스스로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죽어서 묻힐 무덤을 준비해 놓고 두 분의 빛을 보세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보약을 음미하면서 보세요. 제자 수보제님이 스승, 붓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다, 부탁하고 매달리다, 제 일분의 그런 과정과 절차 환경 속에서 1250명이 모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명상 삼매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 설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 보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은 학교 선생처럼 수업시간을 맞추듯 시간이 되면 저절로 강의,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설법을 해야 할 대상, 시기를 잘 살펴서 말씀 설법을 펴신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어느 때는 사오만명의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아무 말이나 행동이 없이 한나절 즉, 3~4시간씩이나 삼매에 드셔서 침묵하고 아무 설법도 하지 않은 그런 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은 상대를 정확히 보고 그 자가 내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먼저 보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오로지 침묵으로 말을 들을 수 있는 준비 명상에 들게 한 뒤에 살펴서 설법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금강경이 설해지는 이 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거기 모인 1250여명의 모든 대중을 부처님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관찰하고 비추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 표현 없이 오로지 침묵, 명상으로 모두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후에 설법이 필요하면 입을 열어 신중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 이분 [선현기청]이란, 내용이 진행됩니다.

24/06/2016

2. 善現起請分 선현기청분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
시 장로수보제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
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 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경 이백불언 희유세존 여래선호념 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세존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
선남자 선여인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
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심 불언 선재선재 수보제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善付囑諸菩薩 汝今鍗廳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연설 선남자선여인 발아누다라삼
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 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막삼보제심 응여시주 여시항복 기심 유연 세존 원요욕문

이상은 제 이분 한자 원본입니다.
이 분은 총 154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사람 몸과 비교한다면 발바닥에 해당되고 앞으로 금강경의 내용이 펼쳐지는 출발의 발걸음 부분입니다. 제 일분 내용처럼 오로지 침묵만 존재하고 스승과 제자 대중이 모두 준비된 뒤에 무엇인가 조용히 진행되는 첫번째 순서 출발점이 제 이분 [선현기청분]입니다. 그럼 소제목 [선현기청]이란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선현기청(善現起請), 보통 한국불교와 불교 신자들은 그냥 수보제가 가르침을 부탁하는 말을 하고 청하다라고 해석하는데 부족한 해석입니다. 이 소제목 속의 바른 의미는 이러합니다.
착할 선(善)이라는 그물에 모두 걸렸습니다. 이 한자 속 의미는 여러개인데 여기서 전 후 문맥과 금강경 전체내용을 보고 그 의미를 선택하여 해석하여야 올바른 해석이 될 것입니다.
착할 선(善), 도덕적인 선악의 의미를 가지는 의미라고들 여깁니다.
그 다음 좋을 선, 좋고 나쁨의 의미, 훌륭하다, 불량하다, 반대의 개념이 들어있다. 친할 선, 사이좋을 선, 친밀하다는 의미, 옳게여길 선, 몸에 좋다는 의미, 아낄 선, 애착이란 의미가 들어있다. 이렇게 여러 의미를 가지는 문자가 선이란 문자인데 그럼 어떤 의미로 이 경전에서는 보아야 하는가?
전후 문맥을 보면 됩니다. 수보제 질문 뒤에 부처님이 하시는 첫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선재선재(善哉善哉) 올바르고 올바른 핵심의 질문을 하고 있다는 인정을 스승,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선(善) 이 글자 속 의미는 올바를 선 즉, 너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올바름을 질문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그 다음 현(現), 나타날 현, 사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현(顯) 자신 머릿속에 있는 혼을 지금 이 공간 시간에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현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지금 과거나 미래가 아닌 시간 없음을 의미합니다.
기(起), 일어날 기, 일어설 기, 일으킬 기. 이 글자 자원을 보면 사(巳), 뱀 사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 금강경 중에서 이 문자가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조용히 천천히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몸을 움직여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청할 청(請), 거지처럼 구걸한다, 물을 청, 질문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청이란 의미는 나는 모릅니다. 알고자 질문 하는데 저는 진정 거지처럼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디 이 질문을 들어 답을 설하여 주옵소서하는 의미입니다.
[선현기청] 이 네 글자 속 의미는 이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은 질문과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종류와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질문과 의문을 각자 개인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질문 중에 누구에게나 사람이면 가장 절실하고 궁극적인 질문,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무엇인가입니다.‘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아니 각자 개인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 질문을 지니고 그 질문에 의문을 풀고자 많은 시간 수 없는 탐구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의문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질문과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현상입니다. 마음이란 지난 과거의 흘러온 지식에 불과 합니다 잘 보세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속에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왜 사람을 인간사람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는가?
제아무리 자신에 대한 탐구를 깊이하고 마쳐도 그릇된 질문이기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인 아니면 성자 또는 깨달은 인간 밖에 되지 못합니다. 자신을 사람이 아닌 신을 초월한 그 무엇이란 질문 의문을 가진다면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그 무엇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무엇에 대한 이름 표현은 수없이 많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붓다, 부처, 보살 등등. 그러나 여기 금강경에서는 그것을 아누다라삼막삼보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아누다라삼막삼보제는 인도 언어이고 다른 문자로 번역 불가능한 문자이므로 이 금강경 또는 모든 불교 경전에서는 인도 언어 그대로 음역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수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질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 인간에 해당되는 질문 의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란 이 존재는 무엇입니까? 하는 의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나 이런 의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의문의 절실함 자신의 삶, 죽음, 모두를 담은 것과 같은 절박한 질문인가? 아니면 스치고 지나가는 호기심 같은 질문 의문인가? 아니면 타인들에게 과시 인정받기위한 속임수 질문인가? 아니면 스승에 대한 실험으로 이런 질문을 하면 스승은 무엇이라 답할 것이며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 평가 할 것인가? 라는 등등의 여러 종류의 의문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와 같은 스승에게 질문하는 것은 진실된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형태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어 질문하여야 스승, 부처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승을 위한 예의가 아니라 자신이 그 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준비인 것입니다. 질문에 내용과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문의 답을 받을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을 표현하는 질문이 되어야 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수보제는 이 금강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질문을 하기 위한 준비로서 스승, 붓다 옆에서 수십 년 준비 수행을 행한 것입니다.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현기청의 의미입니다. 수보제의 질문하는 자세가 질문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 수보제의 질문 자세와 질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법화경 일부를 여기서 예를 든다면 제자 사리불이 질문을 하였을 때 붓다, 스승님은 사리불에게‘질문하지 말라’‘ 정지하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리불은 그 부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또다시 명령합니다.‘질문을 그만두라’ 그러나 사리불은 멈추지 않습니다. 세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사리불을 이렇게 준비시킵니다.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네가 세 번이나 간청 질문하였기에 말하여 주리라’ 그러니 주의 기울여 잘 들어라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질문하는 자의 자세 즉, 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현재의 학교 수업시간의 선생과 학생의 질문, 답변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한마음, 한 몸, 한 생명같은 연인들의 달콤한 밀어같은 영혼의 대화입니다.
금강경 제 이분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붓다와 수보제 그리고 이 기록물의 구술자요, 증언 당사자인 아난존자라는 세 사람 관계를 말입니다. 수보제라는 분은 부처님제자로서 그 장소에 머물렀던 1250명 중 세속의 나이가 연로한 관계로 장로라고 호칭하며 부처님보다 세속의 나이가 대략 10살 정도 연상이고 얼굴에 흰 수염이 엄청 많이 난 노인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옆에서 수십 년 동안 함께 명상을 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 구술자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세속 사촌 동생이란 것입니다.
부처님보다 세속 나이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30세 전후 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난존자와 수보리 관계는 너무나 친밀한 관계 혈족보다 더 친밀한 관계였답니다. 피를 나눈 혈족보다 더욱 친밀한 사이였답니다.
그래서 수보제가 부처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슬퍼하고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난존자는 부처님 혈족, 사촌, 동생이기는 하지만 비서실장 내지 경호원 같은 위치에서 24시간 그림자처럼 매일 부처님 시중을 들었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관계는 어떠하였겠습니까?
부부나 형제, 친구, 애인 이런 세속적인 관계를 뛰어 넘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고 어떤 비밀도 없는 너무나 친밀한 사이, 스승과 제자 또는 연인같은 사이 단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는 그런 사이였던 것입니다.
바로 세 사람 이런 관계 속에서 수보제님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붓다님도 떠나고 마지막 남은 아난존자의 증언과 구술로서 붓다님 육성을 대신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금강경이란 기록물입니다.
이 세분의 사이와 관계를 이해하고 본문을 보는 것이 이 기록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록물 형태는 수보제라는 제자와 붓다라는 스승의 질문과 답변 형식이지만 아난존자의 구술이란 사실을 이해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미지의 세계를 가려면 우리는 날개를 펴고 비상을 하여야 합니다.
그 비상을 위한 준비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준비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금강경 속에 나오는 인류 최고의 스승님들 세 사람이 우리에 비상을 위한 준비 운동을 도울 것입니다. 그 세 사람 붓다 수보제 아난존자이 세분이 우리들 비상을 위해 여러모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 분들의 도움을 두려워하거나 싫증으로 뿌리치고 도망간다면 그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저 높은 미지의 세계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 세 사나이들에 안내와 지도 도움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따른다면 우리도 그분들이 얻은 초월의 미지세계를 맛보고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안내를 따르는 요령은 우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마음의 큰 벽을 허물고 넓고 넓은 세계로 나와야 합니다. 작은 방 아니 우물속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나는 모른다하고 통로를 열어 두세요. 진정으로 나는 모른다 생각한다면 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면 비상할 수 없습니다. 그 알고 있다는 큰 바위 같은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 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나는 모른다는 마음으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마음을 잘라 내세요.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과감히 나는 알고 있다는 그 마음을 잘라 버리세요. 소유일절 하세요.
수보제 그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였습니다. 어떤 누구보다도 대단한 용기와 배짱이 있는 분입니다. 붓다라는 분의 제자로 입문하기 전에 그의 삶은 그야 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그 시대 최고 가문에 태어나서 아쉬움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합니다. 그리고 자타가 인정하는 대 학자였습니다.
그런 분이 자신보다 세속의 나이가 근 십년이나 어린 붓다라는 분에게 모든 것을 바칩니다. 목숨, 사랑, 명예, 권력, 돈,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받칩니다. 너무나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것을 귀의라 합니다. 그러한 귀의 속에서 붓다 앞에 무릎 꿇고 합장하고 온몸을 가장 낮추어 절합니다. 어찌 남자 중 남자, 사나이 중 사나이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 이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마음의 큰 바위 쇳덩어리를 붓다라는 스승 앞에 내려놓습니다. 대학자 권력 돈 명예 사랑 행복 등등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나는 모른다는 큰 선물을 받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저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 두 분의 모습이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사실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흰 수염을 드리운 제자 노인이 젊은 붓다 앞에 사람이면서 신과 같은 모습으로 가르침을 청합니다.
일분에서 보았듯이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이른 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밥그릇과 주변을 정성껏 정리한 뒤 목욕 재개하고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모두가 고요히 내면세계에 들어 깊은 명상을 하고 있는 이 때 백발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로봇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기 주시 속에서 밤이 가고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임 없는 것과 같이 완전한 깨어있음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나비처럼 가벼이 뱀이 또아리를 풀고 머리를 일으키듯이 고요히 일어나 오른쪽 어깨 맨살을 드러내고 정적이 깃든 모습으로 합장하고 두 눈은 완전 내면으로 향한 상태로 다시 두 무릎을 꿇고 머리 이마를 땅에 대고 붓다님에게 절을 올립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붓다님 얼굴 두 눈을 연민과 사랑,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두 입술을 움직여 말씀을 올립니다.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 존경을 표현합니다. 합장을 한 채로 말씀을 올립니다.
[이백불언], 붓다님에 높고 넓고 무한한 말씀에 헌신을 드립니다. 여기 모든 참여자와 여러 사람들의 정신 마음의 눈에 주시력을 잘 보호하여 주시길 바라며 모든 보살들은 붓다, 스승님에게 내맡기며 따르고 배우길 원합니다. 붓다님 올바른 남녀와 많은 사람들이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한 이는 응운하주(應云何住) 운하
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각자 개인 머릿속에 작은 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 모든 마음 잡념들을 어떻게 지켜보고 다스리고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붓다님이 수보제의 그 질문에 입술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선재선재(善哉善哉) 올바르고 올바르다. 그야말로 질문 중 가장 올바른 핵심의 질문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가 답을 주면 받을 준비가 되었구나. 수보제님아! 너의 그 핵심 되고 중요한 질문 듣기를 원하는 너와 너희를 위해서 내 말하리라.’‘올바른 남녀가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보고 알고자하여 자신들의 그 모든 망상, 잡념을 오직 이렇게 다스리고 내려놓으라.’

수보제‘ 예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 잘 듣겠습니다.’
금강경 이분은 수보제님이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이 탄생하게 하는 원인 질문을 통한 가르침을 청하는 대목이며 그 질문의 요지와 질문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슨 내용의 질문을 하고 있는지 잘보고 이해해야 그 질문에 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을 보지 않고 답만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하는 자세 방법에 대하여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똑같은 언어 문자로 같은 내용을 표현하더라
도 누가 어떤 몸 마음가짐으로 말하고 표현 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하는 자세 즉, 몸과 마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 질문에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시 장로수보제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 부분은 스승, 붓다에게 질문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時)라는 것은 제 일분 내용처럼 모두가 설법이 진행되는 강당에서 모두 좌정하여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정적만 감도는 그러한 때에 장로수보제 거기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도 연로하고 그 무리들을 중간에서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제자 수보리가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리적인 내용을 두루 살피고 붓다, 스승님의 상황도 살펴보고 자신의 내면도 살펴보고 한 연후에 자신에 내면 마음을 예리하게 지켜보면서 태양이 움직이듯 뱀이 또아리를 풀고 머리를 들고 움직이듯 고요히 일어서서 오른쪽 어깨 맨살과 팔을 드러내고 두 손 모아 합장한 다음 다시 해가 저물어 가듯 조용히 서서히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머리를 숙였다 다시 들어 올리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말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살피면‘ 장로 수보리’하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스승, 붓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재대중중]은 거기 참석한 1250명과 자신과 붓다를 관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고요하게 명상 삼매에 들어있어서 질문을 하여도 모두가 같이 들을 수 있고 스승 또한 이런 분위기면 설법을 펼쳐줄 것이다. 하는 것을 본 연후에 질문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보통 일반적인 상태의 군중의 집회가 아닙니다. 학생과 선생 교수들의 지식 전달, 강의 같은 상황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채로 질문하여도 무방하고 선생은 답을 설명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수보제의 행동 속에는 너무나 심오한 내용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변을 관찰하고 스승을 관찰하고 질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변이 시끄럽고 누군가 방해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을 살핀 후 온 주의력을 다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지켜보면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소리 없이 바람처럼 나비처럼 뱀처럼 태양 움직임처럼 앉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의 옷을 내립니다.
여기 오른쪽 어깨의 옷을 내려 맨살 맨팔을 드러내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지금 저는 거짓이 아니며 숨김이 없으며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질문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실험하거나 저를 과시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과 미래에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하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속 살 내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른쪽 어깨인가? 인도에서는 과거부터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뇌와 손, 무릎, 발은 지성적이고 이해력이 있는 힘이 있고 일관성을 유지하며 변심과 배신이 없는 것이 오른쪽이다하는 믿음,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왼쪽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이고 감정적이고 불규칙하며 언제나 수시로 변하며 일관성이 없고 배신과 속임수를 부리는 힘이 있다고 믿고 이해하여 왼쪽을 터부시 하였던 것입니다.
현 한국 사회에서도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거나 글씨를 쓴다거나 또는 왼손으로 무엇을 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용변을 본 뒤에 뒤처리는 항상 왼손을 지금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오른쪽 어깨 맨살을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두 손 모아 가슴에 대고 스승의 마음과 함께 하고자하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합장 즉, 두 손바닥을 모아서 가슴 앞쪽에 대는 의미는 좌와 우, 직관과 감정 모두를 고요히 하나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잡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신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겸손을 뜻하며 아만, 나는 대단하다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런 연후에 스승, 붓다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을 합니다. 고요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갑니다. 노인은 급하게 서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수보제 장로도 웅장한 목소리로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말을 이어갑니다.
스승님, 부처님에 지난 과거에 말씀은 항상 높고 깊고 무한하며 항상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세존님 부처님, 오늘 스승님께 바램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참석한 사람이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일으켜 살아가게 그 올바른 마음을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그 사람들을 부탁합니다.
스승, 부처님의 가르침 그 향기에 모두 접촉하여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부탁드리며 참으로 궁금한 의문을 질문하여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보고 알고자 즉, 발견하고자 하는 올바른 남녀들은 어떻게 자신의 내면에 항상 구름같이 피어오르고 흩어지는 그 마음 조각들을 어떻게 내려놓고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까?
여기가 수보제가 질문하는 내용의 핵심이 들어있습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깊이깊이 살피고 보아서 이 글을 보는 분들의 피와 골수가 되게 하옵소서. 수보제 질문의 핵심요지는 이러합니다.
발아뇩다라삼막삼보제심 한자로는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samyak~sambodhi, 이 단어 문장은 고대인도어로 산스트크리어입니다.
그럼 이 단어 문장 속에는 실체적인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 문장일까? 현 한국 불교에서는 이런 종류 의미로 해독, 번역합니다. 무상정등정각 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 높은 올바른 깨달음. 또는 무상정등각 최고의 올바른 평등한 깨달음. 또한 이렇게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성불, 견성, 해탈, 열반, 득도, 한소식, 지혜, 통달무아, 보살, 여래, 붓다 세존, 스승, 반야파라밀, 진리, 일체법, 공, 혜안, 법안, 천안, 불안, 자아발견, 법신불, 광명, 명상, 공덕,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위에 나열한 단어 문장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럼 이렇게 한번 살펴봅시다. 왜 의역하지 아니하고 음역, 소리 나는대로 번역 기록하였을까? 위에서 나열한 그런 의미라면 그 단어를 그대로 의역으로 사용하면 될 텐데 왜 인도 발음 그대로 기록하였을까? 인도어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바로 이 단어 문자일 것입니다.
이천여 년 전 인도어를 한자로 번역하였던 수행자 요진이란 나라에 살았던 삼장이란 수행이름을 지니고 구마라습이란 이름을 가졌던 그 분도 이 단어를 번역하면서 몇 날, 몇 달을 잠 못 이루고 서성이며 이리저리 살펴서 음역과 의역을 동시에 진행하는 고난도 번역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노력과 지혜의 눈을 가진 분이 틀림없습니다. 중국의 삼장법사가 아니면 아마도 누구도 이런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한글로는 더 더욱 번역불가능 문자요, 단어입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컴퓨터란 기계를 한번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컴퓨터의 하드와 소프트웨어를 설명한다
면 어떻게 무슨 단어 문자로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떤 언어, 문자, 말과 그림을 사용하여도 아마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또한 아누다라삼막삼보제란 의미는 컴퓨터보다 더 난해하고 복잡한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하지만 삼장법사라는 분은 이룩하였습니다.
몇 달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붓다가 사용한 언어 아뇩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단어 속 의미를 수행과 명상을 통하여 해독하여 한자라는 문자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구 인류의 또 다른 기적입니다. 붓다가 발견한 심오한 현상을 인도어에서 한자라는 수단에 담아낸 그 혜안과 노력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삼장법사 구마라습 그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구도자요, 스승이었습니다. 그 스스로 알지 못하면 이런 번역은 불가능합니다.
중국과 한국의 이천년이 넘는 불교 역사 속에서 가장 큰 기적이요, 신비를 창조한 분이 바로 삼장법사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삼장법사가 번역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후진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가 번역한 의미를 분칠, 떡칠하여 변질시키는데 열중하였습니다. 어떻게 변질시켰을까? 이렇게 변질시켰습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내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더 이상 바르게 오를 수 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또는 최고 올바른 최고의 깨달음이라고 오역하고 말았습니다.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문자 속 의미는 비유적으로 이러합니다.
각자 개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나체로 태어납니다. 홀로 태어납니다. 친구, 형제, 가족도 없이 오로지 나 홀로 말입니다. 그리고 자랍니다. 몸은 성장하여 가며 늙어가고 죽어갑니다. 그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온몸은 보이지 않는 투명한 그물과 밧줄로 온 몸이 포박당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어둠이 깊어 무엇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 수풀과 가시덤불이 무성한 강주변의 산속에 호랑이, 늑대, 표범, 뱀, 지네, 전갈, 지렁이, 귀신, 도깨비 등이 나의 몸을 잡아 먹기 위해 으르렁거리고 지네와 뱀 등은 내 몸의 구멍 눈, 귀, 코, 입, 항문으로 파고들고 하늘에는 독수리와 부엉이 검은 까마귀가 날아다니면서 호시탐탐 내 몸을 먹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주변에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고 오로지 홀로 버려진 상태에서 혼절, 기절하기 직전 죽음에 두려움, 공포 속에서 벌벌떨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나를 포박 구속하고 있는 모든 그물과 밧줄은 사라지고 몸은 자유로워지고 어둠은 사라지고 환한 햇빛이 온천지를 비추어 주고 주변의 모든 나무와 수풀 동물과 뱀과 호랑이, 늑대 등이 나를 추앙하듯 환영하여 나를 따르고 새들은 환영의 기쁨을 노래 부르고 나무와 수풀 동물들은 기쁨의 춤을 추고 나는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 근심, 걱정, 두려움, 공포 하나 없는 그런 마음과 느낌 속에 새로이 태어나 죽음이 없는 그런 것으로 변하고 하늘, 땅, 사람, 바람, 비, 바다, 물, 강, 나무, 생명체, 무생명체, 소리, 빛, 어둠, 시간이 모두가 나라는 것을 보고 아는 상태가 바로 아누다라삼막삼보제란 단어 문장속의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각자 개인 내면에서 발견, 체험하고 나타나는 현상은 각자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기 금강경에서 수보제는 [심해의취(深解義趣)]하여 한 없이 울었다. 엎드려 울고 서서 울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부모가 죽었을 때처럼 통곡하면서 울었다. 수보제 울음의 의미는 수보제 개인만이 알고 개인의 내면의 폭발, 발견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한국의 고승 원효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웃음과 춤으로 억제할 수 없는 폭발의 웃음과 몸의 춤으로 표현하였으며 중국 선종의 육대조사 혜능이란 분은 지게를 지고 하루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중국의 여자 수행자 비구니 지용은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물도 없고 달도 없다라고 그 순간의 경험은 각자 다르게 표출됩니다. 수보제가 스승, 붓다에게 이날 질문한 내용 의미가 무엇인지 바르게 보고 이해하여야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보제가 질문한 내용은 일반적인 사람 현대사회 속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생각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지난 과거나 지금 현재의 어떤 지식내지 관찰 봄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늘 여기서 설명하는 아누다라 삼막삼보제 의미 해설은 나는 많은 기록물과 경험을 통한 해석입니다.
그러니 이 해석 이 글을 작은 힌트 작은 암시로 여겨서 각자 내면에서 조용히 관찰하고 지켜봄으로 이 설명이 어떠한 것인지 스스로 보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추상적으로 믿지 말고 스스로 탐구하는 작은 힌트로 사용하고 버리세요. 이 글에 매달려 믿음을 만들고 이 글을 추앙하지 마세요. 이 글을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의 눈을 열라. 그것이 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여기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
잘 관찰하여 보세요. 천천히 고요히 이 문장을 이해하여야 금강경이란 경전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 또는 들어가는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됩니다.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發阿耬多羅三藐三菩提心)], 잘 보세요. 발심(發心). 마음을 일으킨다. 결심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국어사전과 일반적인 문자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한 이해입니다. 보라! 잘 보시라! 아누다라삼막삼보제 의미와 실체를 알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발심, 결심할 수 있는가? 그래서 삼장법사 구마라습 스님은 (發)아누다라삼막삼보제(心)하고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가운데 두고 발심이란 두 글자를 앞뒤로 배치, 기록한 것입니다.
발심(發心), 이것은 삼장법사의 부족한 기록입니다. 마음을 일으킨다고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보고 얻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견(發見)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自見)아누다라삼막보제(觀)하라로 기록하였다면 더욱 생생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스스로 보고 그 보는 자를 보아야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이해,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발심이란 올바른 한자적인 의미를 관찰하여 봅시다.
발심(發心), 발(發), 이 한자속 의미는 쏠 발(발사), 일어날 발(몸을 일으킴), 떠날 발(움직이기 시작함), 필 발(꽃이 피어남), 나타날 발, 드러낼 발(발각, 보는 것을 시작함), 드러낼 발(본다는것 견(見)), 밝힐 발(계발), 들출 발(적발 찾아냄), 열 발(문을 열고 들어감. 개(開)), 자 위의 발(發)이란 한자속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서 가장 올바르게 의미를 선택하여야 하는데 나는 이렇게 의미선택을 합니다.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보기 위하여 그것을 자신 속에서 나타나고 드러내고 적발하기 위하여 문 없는 문을 열고 하는 열쇠. 눈을 연다, 개안 한다, 눈을 열기 시작 출발한다로 해석합니다. 이 발이란 문자 속 의미를 어떻게 보고 해석하던 각자 자유입니다. 나의 해석은 힌트, 작은 암시일 뿐입니다.
그 다음 심(心), 일반적 의미로는 마음이라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는 문자입니다.
심(心), 마음 심(念과 相의 총합), 염통 심(몸속의 심장), 가운데 심(상하좌우의 가운데), 근본 심(무의식의 뿌리 드러나지 않은 뿌리)이 마음 심이란 문자 의미를 여기서 어떻게 보는 것이 올바르게 보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봅니다. 위의 발(發)의 의미 [아뇩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자신 내면에서 발견하고 적발하기 위하여 문없는 문을 열기위한 열쇠, 눈을 열기 시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심장이나 혼의 뿌리로 결심하여 기억하고 행하여 간다로 해석합니다.
발심(發心)을 발견(發見) 또는 자견(自見), 관(觀)으로 본다면 여기 금강경 내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發阿耬多羅三藐三菩提心)]의 발심(發心)이란, 문자 속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나열한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다시 세세히 살펴보아야 수보제 질문의 핵심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질문을 오해하면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시작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데 어떻게 목적지에 바르게 도착할 수 있을까요? 답을 얻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문제, 의문, 질문의 요지를 바르게 보아야 바른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질문, 의문을 바르게 보면 답은 저절로 찾아지고 보일 것입니다. 위에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 중에 깨달음이란 단어를 세밀히 관찰하므로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 이 단어는 아마도 우리 한국에만 존재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 단어 어원은 한자 각(覺), 깨달을 각(寤 깨달을 오, 깰 오), 자신의 몸에 있는 다섯 개 구멍의 이치를 이해한다. 그 구멍이란 [안이비설신] 구멍의 작용을 파손한다. 깬다라는 의미입니다.
깨달을 오(悟), 나의 마음을 깨부순다. 깨울칠 각, 곧을 각(곧을 직直)열 개의 눈으로 숨겨진 것을 살펴본다. 깰 교(夢), 어둠속에서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것에서 깨어남.
이것이 한국의 깨달음이란 단어 어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를 살펴보면 한자 깨달을 각이란 최초의 원자는 위의 글자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여 글자도 변하였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잘 들여다보면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컴퓨터에도 나오지 않는 한자인데 치( ),이 글자와 見의 합자인데 앞의 치( ), 이 글자는 뒤져올 치, 뒤따라갈 치, 추종한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문자로서 자원은 발이 밑으로 처져서 땅에 닿는 모양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에 의미는 이완, 경직이 아닌 이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죽은 것처럼 이란 의미도 됩니다.
그 다음 견(見), 이 한자는 참으로 심오한 한자입니다. 볼 견(視), 보일 견, 견해 견(식견識見), 뵐 현(알 현), 나타날 현(顯), 드러날 현(露)이란 문자와 합자입니다.
치( ) 밑에 견(見), 이 글자가 원래 깨달을 각이란 한자였는데 후에 각(覺) 이 글자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이란 경전을 이해하는데 이 각(覺) 자의 이치를 바르게 보아야 오해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깨달음이란 단어 의미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깨달음을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이 글을 읽는 인연 본인들은 진정으로 깨달음이란 단어 의미를 모르시나요? 속이지 마세요. 님 들은 오해이든 이해이든 이미 모두 깨달음이란 망상, 상상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보면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보면 여기서 깨달음을 우리는 이미 모두 알고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상상 속에서 깨달음이란 이런 것, 저런 것하고 벌써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보는 대로 알려드리면 깨달음이란 말과 글은 존재하지만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이해란, 깨달음이란 없는 것이다라고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깨달음이란 오해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불(成佛)이란 단어도 속임수 문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황금 그물에 걸려들어 구속당하고 자유를 잃어갑니다. 이 단어는 순 한문입니다.
한글로는 단어가 존재하지 못합니다. 성불, 이 두 글자를 잘 살펴서 황금 그물로부터 탈출하여야 합니다.
먼저 부처 불(佛)이란 문자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 문자는 인도어 붓다라는 의미를 의역하여 중국에서 새롭게 만든 문자입니다. 그럼 인도어 붓다라는 단어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붓다란 인명이 아닙니다.
즉, 사람 이름이 아니라 어떠한 실체를 칭하는 호칭입니다. 한 예로 하늘에 빛나는 물체를 태양이라 호칭하듯 어떤 현존을 나타내는 호칭이 붓다라는 문자속의 개념입니다.
이 붓다라는 단어 속에는 사람, 인격, 인품, 남녀, 생로병사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습니다. 붓다란 단어속의 의미는 미묘한 현상입니다. 살아있는 영원한 에너지 시작과 끝이 없고 무게와 크기, 고정됨이 없는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를 중국에서 불(佛)이란 의미로 문자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럼 불(佛), 이 문자를 살펴보면 부처 불이라하고 석가모니라는 의미로 되어있습니다. 다음은 어그러질 불(탈 승(乘), 의지할 승, 곱할 승, 탈 것의 승, 참여법 승, 사기 승이란 의미를 지님)
불(佛), 이 글자를 파자하여 보면 인(人), 사람 인, 남 인, 딴사람 인, 타인인품 인, 인격 인, 백성 인이란 의미와 불(弗), 아니 불(不), 떨 불 (去갈 거)의 의미를 지니는 문자입니다.
그럼 이 글자 속 의미는 부처 불(佛)이란 사람이 아니다. 인품, 인격을 가지지 않는다. 백성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불(弗), 아닐 불이란 글자 속 의미를 보면 궁(弓)과 , ㅣ화살로 별빛을 뚫는다는 의미의 글자입니다.
화살과 빛처럼 무엇인가 관통하는 것이란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불(佛)이란, 문자를 중국에서 만들 때 의미는 이러합니다. 보통 개념의 사람처럼 생로병사 하는 인격체 인품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보다 보이지 않는 빛 에너지 같은 힘으로 무엇인가 명중하여 관통하는 힘이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이란 문자 속 의미를 인격체 또는 인명으로 오해하여 숭배하고 신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로 기억하고 이해하여 그 속에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성(成), 이룰 성, 될 성(就:나갈 취, 이를 취) 의미를 가진 문자로써 성불(成佛)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성불이란 본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와 어떻게 다른지 보일 것입니다.
그 다음 해탈(解脫)이란 단어, 문자로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耬多羅三藐三菩提)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문자, 언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도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문자 단어입니다.
풀 해(解)라는 의미인데 이 풀 해라는 의미는 석(釋), 풀 석, 용서할석, 놓을 석, 버릴 석, 일석, 쏠 석(발사), 석가 석(석가모니)의 의미를 지니며 또한 가를 해(분해), 흩을 해, 흩어질 해, 벗을 해라는 의미입니다.
탈(脫), 벗을 탈(解푼다), 벗어날 탈, 빠질 탈이란 의미 글자입니다. 그럼 해탈이란 무엇인가? 해부, 분해하여 그것을 바르게 본다. 또는 무엇인가에 포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인데 불교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는 이런 것을 해부, 분해, 관찰하여 벗어나고 탈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것이란 아상(我相) 나라는 마음 느낌, 인상(人相) 자신을 사람이라고 여기는 생각, 마음, 느낌, 중생상(衆生相) 나는 많은 사람처럼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마음, 생각 느낌, 수자상(壽者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고 살아있으며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고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 마음 느낌, 이 네가지의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을 시작과 끝을 해부하여 이해하고 그 네가지 마음으로부터 동일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로 아누다라삼막삼보제 의미를 오해하여 사용합니다. 다음 득도(得道) 득(得)이란 문자는 얻을 득, 탐할 득, 만족할 득이란 의미 글자입니다. 도(道), 이 글자는 너무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문자입니다. 도(道), 길 도(路 길 로), 순할 도(順 순할 순, 좇을 순, 차례 순, 머릿속에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 구역이름 도, 말할 도(言), 말미암을 도(이유,연유) 도(道)이 파자하여 보면 ( )쉬엄쉬엄갈 착, 조금씩 움직여 간다는 의미와 수(首), 머리 수, 우두머리 수인데 이 글자는 자(自) 목(目) 자신의 이마 머릿속의 눈을 의미한다. 도(道)란 자신의 머릿속에 흘러가는 마음을 자신의 눈으로 세밀히 본다는 것입니다. 득도란 자신의 마음을 본다는 것을 얻거나 자신을 보기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아누다라삼막삼보제로 의미를 부여하여 오해하고 있다.
보살(菩薩)이 단어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너무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인도어로는 보디싸트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지켜보는 자로 남아있는 상태 즉,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 된 상태를 보살이라 칭하는 의미인데 우리는 신비적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고 있다. 이것도 [아누다라삼막삼보리]라는 단어 의미를 대신하여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오역 오용되고 있는 단어 문자는 무상정득각(無上正等正覺) 입니다. 무상정각(無上正覺)도 같은 맥락입니다. 열반(涅槃), 열(涅), 개흙 열, 검게 물들일 열, 이 문자 속 의미는 흙에 물을 부어서 갠다.
즉, 반죽한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반죽하면 물도 흙도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면 마음이 그렇게 변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검게 물들일 열이란 흰 천이 염색되면 색이 변하는 것처럼 내면 정신 마음이 변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즉 평상시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동일시하던 것이 [무아인중생수자상]으로 변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그렇게 의역, 번역하여 기록하지 왜 인도 원어 그대로 표현하여 놓았을까? 이것은 미묘한 오류입니다. 누가 무슨 권위로 이런 단어를 만들어 세상에 유포시켰는가? 맹신자, 권력자, 추종자, 신자, 숭배자, 학자, 도사, 선사, 종교인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단어들을 살펴 설명하는 이유는 수보제의 질문을 바르게 보기 위하여 오해된 표현을 관찰하므로 그 오해의 그물에서 풀려나고 올바른 목표를 바르게 보고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단어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 금강경에서 수보제의 질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 이것이 수보제의 의문이고 질문의 핵심이란 것을 이해하고 금강경 본문으로 들어가야 될 것입니다.
여기 금강경에서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을 저는 분명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발 아누다라삼막삼보제견관]이라고 표현합니다. 발견하라! 보라! 주시하라! 지켜보라! 응시하라! 동일시되지 말고 보는 자로 남으라! 그러니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관(發見觀)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는 것이 수보제 질문의 핵심 의미라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그럼 경전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남자 선여인 발아누다라삼막삼보제심』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 문장도 난해한 문장입니다.
여기서 선남자, 선여인이란 단어를 자세히 살펴야합니다. 선남자, 선여인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문맥상 보면 수보제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선남자나 선여인이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통 남자 여자가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남자, 선여인의 올바른 의미는 이러합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자신의 삶 속에서 제일 중요시 여겨 자신 내면을 탐구하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자신이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게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한 사람 선남자 선여인 올바른 남자, 올바른 여자라 합니다.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란 문장 속에는 수보제 자신도 포함하고 그날 거기 참석한 1250명도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하는 사람이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관(發見觀) 발심(發心)한 이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그것을 발견관할 수 있을까요? 하는 것이 수보제 질문의 요지입니다.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이 문장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수보제 자신과 모든 사람 몸속 즉, 머릿속에 작은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 같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 모든 마음의 현상들을 어떻게 하면 사라지게하고 내려놓고 그 마음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주인이 개를 부리듯 할 수 있습니까? 하는 의미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보제는 벌써 작은 새와 같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하늘의 구름 같은 마음이 아누다라
삼막삼보제를 발견관하는 방해물이요, 다스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의 해결 방법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모든 잡념이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보고 이해한 후에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와 이런 내용의 질문을 스승, 붓다는 보고 듣고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합니다.
선재선재(善哉善哉), 처음으로 가장 올바른 핵심적인 질문을 하고 있구나. 질문 내용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스승, 붓다님이 다른 모든 질문에 대하여 선재선재하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때 즉, 사리불이 어떤 질문을 하였을 때는 질문 자체를 하지말라. 질문을 받아주지 않는 그런 가르침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 이날 수보제 질문에 스승, 붓다는 수보제에게 평상시에 보여왔던 반응하고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보제 내면을 미리 관통하여 보고 이 질문을 하는 제자 수보제는 답을 주면 받아드릴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껏 올바르고 올바른 핵심적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너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구나하는 의미로 선재 선재하고 인정합니다. 막연한 인정이 아닙니다. 수보제 내면마음이 혼란스런 것을 잡아주는 인정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반복하여 잡아줍니다. 제자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수보제야 하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측면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 속에서 수보제란 이름이 총 136번, 보살 36번, 여래 87번, 세존51번, 붓다를 호칭하는 횟수는 13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승 붓다는 제자 수보제를 이렇게 여러번 호칭하고 수보제는 스승, 붓다를 이렇게 많이 서로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문맥상 의미 전달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 보다 그 호칭하는 순간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미묘한 에너지 교류가 일어납니다. 현대 학교에서 학생과 선생의 수업 강의나 대중 정치, 집회의 질문 답변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사이에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것 같은 오고감의 교류, 질문, 답변입니다. 그리하여 선재선재(善哉善哉)하고 제자 이름을 부릅니다.
수보제님아! 하는 이 부름 호칭은 서로 깊이 교류되는 다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 두 눈을 마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보하고 부를 때와 유사한 현상입니다. 스승이 가까이 있는 제자 이름을 호칭할 때는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전달하고자 할 때 부릅니다. 수보제는 스승 가까이 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교류를 위한 유혹입니다.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善付囑諸菩薩 汝今鍗廳 當爲汝說
지금 이 순간에 네가 나에게 부탁하여 황제의 말처럼 귀히 듣기를 청한 것, 모든 보살들에 생각을 올바르게 보호하고 나와 기운이 연결되길 바라는 것을 그렇게 하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내면에서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發見) 하고 관(觀)할려는 남자, 여자 각자 몸 머릿속에 있는 그 모든 마음을 이렇게 내려놓고 스스로 다스리라. 오직 그렇게 하라. [세존 원요 욕문] 예, 스승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함으로 듣겠습니다. 금강경 제 이분 내용을 다시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수보리가 2556년 전 어느 봄날 오전 1250명이란 구도자와 스승, 붓다님과 수십 년 함께 기거하며 나는 무엇인가? 라는 또는 아누다라삼막삼보제란 의문을 가지고 매일 탐구 생활하던 어느 날 그 무리들이 아침밥을 먹고 목욕재개하고 강당에 모여 모두가 명상삼매에 들어 고요히 각자 마음을 관조 지켜보기를 행하던 중에 그 참석자 모두의 질문이요, 의문이였던 것을 수보제 제자가 대표로하여 질문을 스승, 붓다에게 합니다.
그 질문하는 것에는 일정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쉽게 그런 자세를 가질 수 없는 침묵과 깨어 있음의 절정의 자세로 고요히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움직여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 맨살을 드러내고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스승을 주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주시하면서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질문합니다.
여기 참석한 본인 수보제를 비롯하여 참가자 모두의 생각을 이끌어 주고 보호하여 달라고 애원, 부탁하며 또한 붓다, 스승의 그 에너지 파장에 주파수가 접속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 연후에 궁극적인 의문을 질문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발견관하기 위하여 발심을 어떻게 일으켜야 합니까? 즉, 사람의 생로병사는 왜 일어나며 그것은 무엇입니까? 또한 사람 속에는 작은 새 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고 하늘의 구름같이 오고가는 이 마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스리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보려면 그 보는 눈을 어떻게 하면 열 수 있습니까? 하는 의미에 질문을 합니다.
여기서 잘 살펴야 하는 것은 위의 질문 내용은 일반 사람이 지식적으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 가족, 재물, 명예, 애정, 어떠한 욕망도 모두 걸고 포기한 절실한 질문입니다. 학생이 선생에게 또는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형식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또한 학자가 논문을 쓰기 위한 지식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수보제 질문은 자신의 혼을 태우고 심장을 멈추게 하며 자신의 온 존재가 진동 전율하는 질문입니다.
이 금강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나 이 수보제가 한 질문이 자신의 질문이 되어야하며 스치고 지나가는 상념의 질문, 의문이 아니라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박동 속에서 함께 항상 뛰며 매 호흡하는 숨 속에서 느껴지는 정도의 절실함, 간절함, 갈증이 일어난 상태에서 가지는 질문이 수보제의 질문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답을 찾고 구하기 전에 문제 의문 질문의 내용을 제대로 보고 알아서 모든 생명 노력을 기울인다면 말과 문자가 아니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답이 올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런 질문 의문으로 자신의 존재를 불 태울 수 없습니다. 이유는 아직 성숙된 영혼의 전생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 의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 존재는 이미 전생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만큼 성숙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 글을 보고 지금 당장에 그런 결심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고 익어가는 길입니다.
금강경이란 본문을 더 멀리 깊이 이해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보고 얻고자 한다면 먼저 강렬한 질문 의문을 가슴깊이 새기고 모든 것을 건 도박처럼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여 한 글자, 한 글자를 파고들겠다는 의지결심의 맹세를 자신 심장에 비수처럼 꽂고 앞으로 가야 서서히 눈이 열려갈 것입니다. 이런 결심 결의가 없는 사람은 이 글이 무의미한 낙서내지 횡설수설의 놀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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