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016
1. 法會因由分 법회인유분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
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오 십 인 구 이 시 세 존 식 시 착 의 지 발 입 사 위 대 성 걸 식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洗足已 敷座 而坐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세족이 부좌 이좌.
일분의 총체적인 의미는 육하원칙에 의한 이 금강경이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라는 것을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 한문 원본을 기록하는 이유는 한글로는 도저히 의미를 담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기에 한문 원본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한자라는 특성을 이해하고 경전을 본다면 더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한 일(一)이라 보통 일반적으로 발음하고 숫자적인 개념으로 많이 통용됩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한 글자 한문 속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숫자적인 개념으로 하나 둘 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첫번째 일, 제 일, 오로지 일, 같을 일, 동일하다, 온 일, 온통 일, 혹시 일, 만일 일이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한자라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다른 예로 밥 식(食)이라고 간단하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이 문자의 전후 의미 즉, 전후에 어떤 문자가 오느냐에 따라서 의미는 변합니다. 본문 중에 걸 식과 반사 흘이란 단어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서는 식으로 표현하고 어디에서는 사로 발음 표현됩니다. 그러니 한자란 문자는 어렵기도 하지만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경전을 보아야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자에 매달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자는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입니다. 이정표를 바르게 보아야 목적지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자가 가르키는 목적지는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길이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같은 길이 아니라 바다 위나 허공을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정표를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이정표에 집착하여 목적지를 보지 못하고 이정표에 맴도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서는 안 되겠지요.
금강경 제 일분 법회인유 속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먼저 소제목 법회인유(法會因由)란 의미는 이러합니다. 백년천년을 두고도 서로 만나서 친밀하게 반가운 사람들이 붓다를 보고, 발견하고 하는 연유, 인연이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보통은 법회가 열리는 인연이라 해석하는데 잘 관찰하여 보세요. 그럼 보일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 소제목은 붓다가 말하여 붙인 제목이 아니라 금강경이란 기록물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이글을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문장이란 사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어느 기록에는 금강경 원전이 27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언제 누군가 모르는 사이에 5분을 더 추가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기록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금강경 전체 내용을 잘 관찰하면 삼십이분이란 구색을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5분은 붓다, 스승의 육성이 아닌 기록자들의 교묘한 추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27분을 32분으로 하였는가? 여기에는 참으로 미묘한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붓다 여래의 삼십이지상 즉, 신체적인 삼십이 특징을 내포하고 숭배 추앙하기 위하여 삼십이분으로 작성 기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금강경 전체내용을 잘 관찰하면 보입니다. 소제목 삼십이분이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본문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제목들도 여러개 나타납니다. 앞으로 그 부분을 살펴볼 것입니다.
제일 법회인유분 내용은 이러합니다.
금강경이 탄생하는 환경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인류 인간 마음 정신세계 최고 경지를 기록하는 기록물에서 장황하게 그 환경 현상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대 그 지역 환경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 어떤 사람과 누가 어떤 삶속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그 말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으며 그 환경, 장소, 사람들에 대한 모습만 보아도 그들에 마음 가치관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어부는 바다와 고기에 대하여 잘 알고 가치관이 오직 바다와 고기에 대한 이해로 마음 가득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지배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가치관을 만들어 마음을 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치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금강경 제 일분 법회인유분 기록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육하원칙 같은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여시아문(如是我問)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록자들의 완전한 오기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세계 최초로 올바르게 제가 해석을 할 것입니다. 불교의 많은 경전 첫 머리에 대부분‘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고 기록되고 시작합니다. 왜, 경전 기록 첫 머리에 이렇게 기록되었는가 보다도 잘못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바르게 기록하여야 합니다.
여시아견문(如是我見問)‘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볼 견, 보았다는 것을 첨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 내용이 진실 되고 올바른 권위가 살아납니다. 자~ 관찰하여 봅시다.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은 아난존자의 구술로 기록되어집니다. 아난존자는 붓다의 시봉자로 항상 그 옆에서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일분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면 부족하고 잘못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하여야 올바른 기록이고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불교의 많은 경전 첫머리에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기록되었는가? 이렇게 말하고 기록되어야 올바르지 않는가? 붓다,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하고 기록하여야 올바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들었다 왜?‘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기록하였는가?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내재합니다. 아난존자 본인은 붓다, 스승의 말을 듣고 보았으나 붓다가 의미하는 의도를 자신이 잘못 듣거나 오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확정이 아니라 가정을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붓다, 스승이 한 말씀 중에 자신도 모르게 어떤 생각 단어를 첨삭 내지 분실하여 내용과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붓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는 확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가정을 먼저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하는 내용 속에는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들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불교의 많은 경전 첫머리를 고쳐야할 것입니다.‘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새로운 사실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맹점을 가지는 것이 큰 병입니다.‘ 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 여시아견문이라 하시라.
금강경 첫머리 [여시아견문]‘나는 이렇게 보고 들었다’는 이러합니다. 아난존자 본인이 보고 들은 것 중에 가장 골수와 영혼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모습과 말을 의미합니다.
아난존자 세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잊혀지지 않고 지울 수도 없는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반이자 선배이고 가장 가까웠던 수보제의 폭발적인 울음입니다.
제 십사분에 나오는 [심해의취 체루비읍]을 아난존자는 보고 수보제 전후 사정을 보고 듣고 하였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 시켜주자면 그날 수보제가 울던 모습은 아니, 울었던 울음은 개인의 울음이 아니라 인류 전체 인간의 울음이었습니다. 하늘, 땅, 공기, 빛과 어둠, 물, 불, 모든 존재의 진동이요. 꽃피어남이었습니다. 그 날에 모습은 이러합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많은 시간 수보제와 붓다 그리고 많은 제자 무리들이 일년 이년이 아니라 수십년 자신의 마음을 보고 이해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탐구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도박 같은 수행 탐구가 매일 이어졌습니다.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해가 뜨나 밤이고 낮이고 살아 숨 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을 보기 위하여 스승, 붓다를 중심으로 일체를 이루어 시간, 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서로 모두가 숨소리 눈동자 하나 움직임도 예의주시하며 매 공간 시간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더 없는 서로에 존경, 기쁨, 감사로 너의 것 나의 것이 없는 공동 운명체적인 상황이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보제가 질문하고 많은 대중이 주의 깊게 함께 보고 듣는 순간에 기적 같은 이변이 신비스럽게 일어납니다.
수보제 나이 약 65세 전후로 노인이 되어 흰 머리카락과 수염을 드리운 건장한 노인이 철없는 어린아이가 울듯, 부모 잃은 자식이 통곡하듯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애인이 죽어 떠난 것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의 눈물을 대변하듯 주변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있는 것 같이하여 눈물은 폭포수 같이 흘러내려 바다를 이루고 온 몸은 시체처럼 굳어지고 입에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흐느낌과 폭발의 불기운이 퍼져 나오고 심장은 멈출 것 같고 콧구멍으로는 숨이 공기가 들어가는지 나오는지 느껴지지도 않고 주변의 모든 형상들은 과거의 형상이 아니고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존재감마져 사라지고 오로지 감당할 수 없는 크나 큰 기쁨만이 감도는 그 순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울음이 얼마라고 시간을 말할 수 없는 동안 눈물의 바다를 이룹니다.
이 눈물은 아누다라삼막삼보제라는 비존재의 보물로부터 샘솟는 진리의 표현이요, 궁극을 보았다는 증거의 표출이 샘솟아 우주의 별 은하수같이 영원히 빛나는 별이고 감로수와 같이 온 몸을 적시고 모든 존재들의 고향 근원의 바다에서 흘러넘치는 법비요, 아누다라삼막삼보제의 향기였습니다.
이 날에 수보제의 눈물, [심해의취 체루비읍]이 없었다면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은 이 지구상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며 불교라는 종교도 다른색의 형태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이 날에 수보리의 울음, 눈물은 아난존자 홀로 본 것이 아니라 1250명을 포함한 붓다와 시간 공간이 함께하였다.그 날의 그 충격이 아난존자의 가슴과 영혼 골수 속에 스며들어 있던 것이 붓다가 떠난 뒤 아난존자의 입을 통하여 재현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이란, 이 수보제의 울음 눈물을 기준으로 하여 왜 그렇게 울며 눈물을 한 없이 흘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울음 뒤에는 어떻게 무엇이 변하여 갔는가를 기록한 문헌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는 인연들이여, 부디 문장과 문자에 속지마시고 그날 수보제가 흘렸던 눈물바다에 뛰어들어 함께 울어 보시요. 망설이지 말고, 두려워 말고, 주변을 살피지도 말고, 오로지 자신 홀로 속에서 수보제 울음 눈물을 먹고 마시고 흡수하고 함께 울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것을 자르고 포기하여 보라.
온 몸의 힘을 버려 보시라. 눈동자의 움직임 호흡의 들숨, 날숨마져 놓고 그냥 정신없이 지켜보라. 지켜보라. 이것이 금강경 시작의 여시아견문의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왜 수보제가 울게 되었는지 설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일시(一時) 이 부분의 올바른 이해는 이러합니다.
어느 때에 하고, 세계 불교 학자와 승려들은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55년전 사계절 중 봄 어느 날 오전에 붓다와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장소는 인도 코살라 국 슈바라스티라는 도시이고 그 도시는 인구가 구십만 호이며 구십만 호란 가구 수로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인구수 조사와 다르며 그때에는 개인 개인 인구 수 보다는 가구수를 가지고 인구수를 측정하였답니다.
그럼 한 가구당 가족 수는 지금과 같은 소가족이 아니라 대가족 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한 가구당 가족 수를 8~15명 정도로 추산한다면 얼마나 되는 인구가 거주하였을까요? 대단히 거대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서 붓다님은 25년을 거주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번역자 삼장법사는 왜, 이런 표현으로 번역하였는지 많은 의문이 듭니다. 위국이란 바로 코살라라는 나라고 수급고독원이란 슈바라스티라는 도시 속 사원 기원정사를 의미하며 조용하고 고요한 사원, 절 그곳에서 이 금강경 내용이 설하여 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본 이 부분 설명은 이러합니다.
슈바라스티라는 아주 큰 도시 주변에 수풀이 울창하고 꽃과 동물 자연이 풍요로우며 맑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먹고, 자고, 입고 하는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룬 그런 도시와 아름다운 정원 같은 곳에 있는 절 사원, 기원정사라는 곳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與大比丘衆 千二百 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
여대비구중 천이백 오십인 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
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洗足已
대성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 본처 반사흘 수의발세족이
敷座 而坐 』
부좌 이좌
이것이 일분 내용인데,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붓다와 그곳에 참석한 인원 구성과 매일 생활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아난존자는 이런 환경을 금강경 첫 머리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가 그 사람들의 마음 내면세계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두고 가정을 꾸리고 좋은 집, 맛있는 음식, 좋은 옷, 많은 귀금속, 보물을 얻고 타인들에게 자신을 과시, 자랑하고 잘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여 인정받고 박수받고 추앙받고 많은 재물과 명예를 얻으려는 교활한 계산된 생활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고 탐구하며 서로가 참으로 귀히 여기며 일심일체의 공동체 같은 모습을 설명하므로 금강경 본문을 이해하는 또 다른 설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와 그 제자 그리고 함께하였던 많은 무리들이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봄으로써 내면세계에 또 다른 안목을 열 수 있으며 자신내면 탐구 여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는 각자 개인 내면의 보이지 않는 그 밧줄과 그물을 자르고 밝고 밝은 눈으로 자신의 본성을 보고 이해하는데 또 다른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보겠습니다.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 俱』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 구
많은 비구와 대중 천이백오십 명이 함께 동참하였다. 이 의미를 더 자세히 관찰하면 붓다와 거기 참석한 인원수와 사람들에 부류 즉,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떻게 참여하여 함께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참여한다는 의미는 몸만 거기에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자 몸속 또는 머릿속의 모든 마음을 관찰하고 탐구하기 위한 대단한 결심을 한 마음의 상태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비구중(大比丘衆) 여기서 한자로 대(大) 이 글자 속 의미를 잘 보아 야 하는데 부피적인 형상적인 측면으로는 크다는 의미를 지니는 글자로 일반적으로 의미를 본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한자 대(大) 이 글자를 크다는 수량적인 측면도 있지만 대강 대(槩,대개 개, 내면세계를 함께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비구중(比丘衆), 이 단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비구라는 단어와 중이란 단어 두 개로 볼 수도 있고 세 글자를 한단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먼저 비구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구(比丘)란 인도어로 비쿠 즉,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고자 일반적인 삶, 재물, 명예, 가족과 가정을 이루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고자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불교 승려 그것도 남자 승려를 비구라고 한다고 이해하는데 부족한 이해입니다. 인도의 다른 종교 즉,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도 비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 한자 비구라는 문자 속 의미는 무엇인가? 비(比), 이 한자 속 의미는 견줄 비, 비례 비, 무리 비, 나란히 할 비라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서로 견주어 예리하게 지켜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 다음 구(丘), 언덕 구, 무덤 구라는 의미의 한자인데 시체처럼 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삼장법사가 의미를 부여하여 인도 비쿠라는 단어 의미를 이렇게 만들었다. 여러 무리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항상 시체처럼 지켜보는 자라는 의미를 만들어 번역하였다.
또한 인도에서는 가정을 버리고 떠돌면서 거지처럼 얻어먹고 살아가는 자를 비쿠라 하기도 한다. 단 수행하면서 떠도는 자를 의미한다. 그럼 여대비구라는 단어 속 의미는 여기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견주어 비교하면서 각자 내면세계를 항상 시체처럼 고요히 지켜보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중(衆), 무리 중, 많을 중이란 의미의 문자인데 일반적으로는 정확한 인원수를 알 수 없는 비교적인 측면의 인구수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이 글자 자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글자 자원 의(議)는 이러합니다. 많은 사람 군중 무리가 눈으로 한 곳을 응시, 주시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닙다. 여기서 눈은 육안의 두 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대비구중이란 실체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아뇩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로지 자신의 내면 탐구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천이백오십인이란 사람 수가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이러합니다. 아난존자가 그날 사람 수를 한명한명 체크한 것이 아니라 매일 펼쳐지는 설법과 명상 장소는 건물 내부이며 그 건물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자리수가 1250개 좌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외가 아니라 기원정사라는 사원 건물 내부에서 이날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좌석 배치는 가운데 붓다님이 앉고 그 주변으로 1250개의 자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붓다의 설법을 보고 들을 수 있기에 한번 상상해 보시라.
1250명 정도의 사람이 한사람의 말을 경청하고자 한다면 어떤 형태로 앉아야 서로 잘 보고 잘 들을 수 있겠는가? 영화관의 자리 배치처럼 원형의 돔을 이룬 형태가 가장 좋은 자리 배치일 것입니다. 또한 여기 참석 인원은 이러합니다.
1250명은 출가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지금 학교와 같이 집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기에 기거하면서 붓다와 함께한 인원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화경 같은 기록을 보면 수만 명 즉, 팔만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출가자 권속 즉, 출가한 사람을 따라온 가족 추종자들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에서 1250명이란, 의미는 오로지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는 인원을 의미합니다. 다음 구(俱), 이 문자 속 의미는 1250명 모두가 그곳에서 명상 수행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갖추고 함께 참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도구란 각자 밥그릇 즉, 바루와 옷 먹고 자는 것과 세면 목욕할 수 있는 도구를 각자 갖추어서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출가하여 그곳에 온 사람에게 기원정사 절에서 그런 도구를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참 준비하여 참가해 생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시(爾時)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매일 생활하는 중에 세존(世尊) 식시(食時) 착의지발(着衣持鉢), 밤이 가고 아침이 열려 아침 식사할 때가 되어 부처님도 손수 여러 사람과 함께 옷을 가지런히 하고 나무로 만든 밥그릇과 쇠로 만든 밥그릇을 손수 각자 지참하고 기원정사를 출발하여 많은 사람이 살고있는 성,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地本處 飯食訖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한집 한집 차례로 먹을 음식을 구걸하여 출발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와 여럿이 함께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섭취하기를 마치시었다. 그러고 는 밥그릇을 세척하여 잘 정돈한 뒤 입었던 옷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세면장에 들어가서 목욕 재개하고 큰 강단 설법 장소에 들어가서 모두가 지정된 자리에서 고요히 명상에 들었다.
[부좌이좌]란, 자리를 펴고 집 안 즉, 건물 안에 고요히 좌정하고 말을하고 들을 준비를 서로 하여 명상적인 상태로 연화좌로 앉아있었다. 왜 이런 장면을 아난은 구술하고 있는 것일까?
그날 수보제가 울었던 그 순간을 이해 하는데는 이런 세세한 전후 사정의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수보제 제자의 폭발이 일어났던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모습을 연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수보제의 폭발적인 울음을 느끼고 우리도 수보제가 보았던 것을 볼 수 있고 폭발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말고 즐거운 마음에 여행이라 여기고 이 글을 본다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붓다와 수보제 아난존자의 기운과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는 여행을 즐겨야 합니다. 지구 인류에서 가장 높게 비상한 인물 그분의 가르침과 수보제의 눈물을 이해하고 보고 알려면 우리도 그분들의 작은 생활모습도 관찰하여 그 분들의 가르침을 이해,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수보제의 눈물바다 마음의 폭발이 이루어지게 되는 원인은 이런 환경과 생활 속에서 점차적으로 에너지가 축척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작은 일들도 조용한 마음으로 미세하게 관찰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 또는 개안, 성불, 득도, 발견아누다라삼막삼보제라는 것을 대중이 보고 스승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이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보제의 울음이 최초이고 마지막입니다. 여타 다른 깨달은 제자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공개되지 않은 시간,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수보제는 스승, 붓다와의 대화 즉, 질문과 답변 속에서 스승이 지켜보고 1250명이란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득도, 해탈, 깨달음,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발견하게 되는 참으로 신비하고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깨달음을 얻은 각자들이 있지만 이렇게 붓다,스승이 지켜보고 인증하고 증명하여 주고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수보제 제자뿐이며 이 금강경이란 기록물이 소중하고 귀중하며 또한 아난존자가 구술하게 되고 기록되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그런 수보제의 울음 폭발이 이루어지기 전과 이루어진 후의 과정을 이해하므로 그 수보제 폭발의 경험을 공유하고 모두가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지표요, 증거가 되므로 우리는 그 분이 살았던 장소 생활하였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아름다운 영혼의 여행이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시간은 제가 먼저 2555년 전 어느 봄날 오전이라 알려드렸습니다. 장소는 인도 코살라국이란 나라의 슈바라스티는 영광의 도시이며 그 아름다운 정원같은 아주 좋은 명당의 거주지에 집을 지어놓고 어떻게 어떤 사람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참으로 재미난 여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 각자 그림을 한번 그려 보세요.
붓다와 1250명이란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집들과 주변 모습을 그들이 거주하던 집을 기원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절 또는 사원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먹고 자고 생활하는 공간 건물이였습니다.
그 건물은 바로 금강경에 등장하는 붓다 제자 수보제라는 분의 육촌형님이라는 혈족이 설계하고 건축하여 여럿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이용하는 건물, 건축이라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건축물 중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답게 건축된 건물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먼저, 그 건축물 전체 구조는 환기가 잘되고 생활하기 가장 편한 구조로 건축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대시설로 화장실, 세면장, 주방, 세탁소 등이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부처님도 먹고 자고 말하고 숨쉬고 살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수보제와 아난존자와 약 1250명이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던 것이지요. 개인 붓다에게 다가서면 그분이 입은 옷과 먹는 밥그릇 그리고 잠자리 이불 베개도 살펴볼 수 있겠지요. 더 가까이 가면 그분의 몸도 볼 수가 있지요. 그럼 오늘 그분의 몸 육체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과거 기록물을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체적 특징 내지 육체 전체를 기록한 부분을 [삼십이지상]이라 부르는데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혹, 이 글을 보고 저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마시고 인내하시고 금강경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판단하시길 권합니다.
삼십이지상, 이 부분은 동국역경원 발행 불교용어 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부처님 성기까지 너무나 잘 기록 되었는데 부처님 항문의 기록은 없습니다. 발바닥부터 시작됩니다.
1.발바닥이 판판함
2.손바닥에 수레바퀴 같은 무늬가 있음
3.손가락이 가늘면서 길다
4.손발이 매우 부드러움
5.손가락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비단결 같은 막이 있음 6.발꿈치가 원만함
7.발등이 높고 원만함
8.장단지가 사슴 다리 같음
9.팔을 펴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감
10.남근 즉 자지가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이 말
자지 같음
11.털구멍마다 새까만 털이 남
12.키가 두 팔을 벌린 길이와 같음
13.몸의 털이 위로 쓸려남
14.온몸 빛이 황금색임
15.몸에서 솟는 광명이 한길 됨
16.살결이 보드랍고 매끄러움
17.두 발바닥, 두 손바닥, 두 어깨, 정수리가 모두 판판하고 둥글며 두터움
18.두 겨드랑이가 편편함
19.몸매가 사자와 같음
20.몸이 곧고 단정함
21.양 어깨가 둥글며 두둑함
22.치아 수가 40개 임
23.치아가 가지런하고 빽빽함
24.송곳니가 희고 큼
25.뺨이 사자것과 같음
26.목구멍에서 맛 좋은 진액이 나옴
27.혀가 길고 넓음
28.목 소리가 맑고 멀리 들림
29.눈동자가 검푸름
30.속눈썹이 소의 것과 같음
31.두 눈썹 사이에 흰털이 남
32.정수리에 살 상투가 있음.
이것이 붓다라는 분의 육제적인 부분을 기록한 삼십이상 또는 삼십이지상이란 기록인데, 모든 육체적인 구멍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중요한 귀 구멍 속과 똥구멍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붓다의 항문은 어떠했는지 정말 궁금한데 똥을 잘 싸야 잘 산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싸는 일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 금강경, 이 기록물은 지금으로부터 2555년전 어느 봄날 오전 약 2~4시간 사이에 탄생하는 신비와 기적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붓다와 제자 수보제라는 두 분 사이에서 지구 위 인류의 시작과 끝을 단 2~4 시간이란 동안 완전하게 설명하고 표현한 인류 최고의 문헌입니다.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떻게 지구 위 인류의 모든 것을 단 2~4시간 동안 논술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음으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그날 그 일이 일어난 것에는 수보제의 많은 과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날 2~4시간이 존재하기 위하여 수보제와 붓다가 수십년 함께 생활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물 내용을 체득 내지 이해하는데 몇 수십년이 걸려도 혼자서는 이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붓다님과 제자 수보제 두 분은 단 몇 시간만에 완성한 것입니다. 아마도 인류의 기적 중 이보다 더한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단 몇 시간만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이 금강경이란 내용이 탄생하기까지는 붓다와 수보제 인생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두분에 인생이란 전생 즉, 금강경이 탄생하는 그 시간에 육체를 유지하기 전의 전생도 포함되는 인생입니다. 비록, 단 하루에 탄생하는 기록물이지만 금강경이 탄생하기까지 두 분을 매체로 인류의 모든 영적인 측면이 함축된 매체들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두분이 지구와 우주의 모든 과거를 담고 있는 매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금강경이란 내용을 글로 읽고 말로 소리 내어 행할 수 있지만 말과 글 넘어 의미 실체를 체득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평생 내지 수십 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 모두는 각자 하기 나름입니다. 한 예로 달마대사로부터 여섯 번째 법맥을 전수받은 제자 혜능이란 분은 약관의 나이 23세에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더벅머리 총각 나무꾼에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미천하게 생활하고 살아가던 어린 청년이 이 금강경 단,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주]라는 소리를 듣고 금강경 전체 내용을 체득했다는 것을 증명으로 본다면 참으로 묘한 것일 뿐입니다.
이 글을 보는 님들은 그 무지한 나무꾼 보다는 더 지성적이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더 발전된 현대 문명 속에 살고있는 더 성숙된 사람들이 아닐까요? 중국의 선사 혜능보다는 더욱 좋은 여건 성숙된 시대 현대에 살고 있으며 혜능이란 무지한 나무꾼이 보았던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대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신비가 님의 궁전 앞에서 속삭이고 있네요. 오늘 이 순간에 님을 유혹하고 이끌고 있네요. 저 넘어 세계로...
금강경 속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핵심입니다. 가정, 부모형제, 친구, 사회, 국가, 이웃, 남자, 여자, 도덕, 예의, 선과 악, 죄와 벌, 천당 ,극락, 지옥, 부자, 가난함, 명예, 권력, 숭배, 믿음, 불행, 행복, 축복, 공덕, 복덕, 깨달음, 영혼, 죽음이 없다. 부처를 믿고 따르라는 것도 없다.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자신을 보는 방법과 과정과 결과, 자기 주시, 자기응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하라.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넘어 마음속을 보라 그 중에서도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생각느낌, 나라는 생각느낌, 나는 사람이라는 생각 나는 많은 사람중의 한사람이다라는 생각, 나는 지금 숨 쉬고 살아있고 미래에도 숨쉬고 살다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하는 마음을 주시하라. 보는 자를 보라만 있다.
문자는 미묘한 도구입니다. 또한 짐을 나르는 수레이기도 하고 보는 자를 알고보고 하려면 보는 행위와 과정을 보아야 하는데 즉, 관찰 주시를 하려면 어떤 것이 올바른 관찰이고 주시인지 보고 알아야 합니다. 지구상에는 여러 문자가 있지만, 본인이 이해하기로는 한자만큼 깊고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문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외부의 사물을 표현하는 것보다 내면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은 볼 관(觀), 볼 람(覽)의 차이점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관(觀), 이 글자 속 의미는 이러합니다. 물론 문법적 해석이나 학자적 입장에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저는 각자 개인의 내면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중심을 두고 볼 것입니다.
관(觀), 이 글자는 사람 내면의 마음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문자입니다.
각자 개인 머릿속 즉, 이마 속에서 작은 새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잡념 마음 조각들을 자신의 내면의 또 다른 눈으로 조용히 본다. 즉 작은 잡념을 꼬리 작은 새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새들이 숲에 숨어서 울고 있는데 그 새를 보려면 조용히 아주 천천히 숨죽이고 자세히 관찰하여야 그 새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나면 새는 날아가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자신의 마음 조각들을 보는 과정에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입니다.
다음 볼 람(覽), 이것도 눈으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인데 이 문자 속 의미는 인간 개인 내면이 아니라 외부를 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람(覽), 이 문자 속 의미는 이러합니다. 파자하여 살펴보면 감(監), 볼 감, 살필 감, 비추어볼 감, 거울삼을 감, 감찰 감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글자 자원은 쟁반에 물을 부어놓고 그 수면을 거울삼아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자신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볼 람(覽)이란 문자 속 의미는 비유적으로 거울에 비추어 본다. 또는 비교하여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관(觀), 람(覽) 이 두 글자 모두 본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분명히 다른 각도에서 본다는 의미를 지니는 문자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을 이해하고 보려면 바로 관(觀)의 의미로 자신을 보아야 금강경 내용을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횡설수설 막작시념 막지어서 생각하고 막작시설 막지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영광의 도시 슈바라스티라는 도시의 기원정사라는 공동체 속의 하루아침이 열립니다. 사람 부처도 먹어야 살기에 먹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공동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 살았는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나 어떤 일을 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거지처럼 단체로 부처와 제자 모두가 깡통 밥그릇을 들고 얻어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자급자족하지 않고 걸식 즉, 거지처럼 얻어먹었는가? 많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또한 부분 부처님 본인도 깡통바루를 들고 거지처럼 밥을 얻으러 걸어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겠지요.
만약에 한국에서 제일 큰 절의 주지나 조실 방장을 보고 깡통들고 밥어먹고 살라하면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찌되었든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옷을 가지런히 하고 1250명이 단체로 밥을 얻으러 마을로 들어가서 한집한집 차례로 음식을 빌어 그 집이나 도중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로 돌아와 단체로 같이 식사를 하고 밥그릇과 자리를 정리하고 세면과 손발등 목욕을 하고 모두가 자리를 펴고 부처님은 가운데 앉고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모두가 고요히 명상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발을 닦았다하는 부분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온 몸을 목욕하였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발을 씻었다하는 세족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인도에서는 과거나 지금도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가르침을 정중히 받아들인다는 의미 나는 모르고 님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스승의 두 발에 이마 얼굴을 대거나 두 손으로 어루만지므로 귀의와 복종을 의미하는 하나의 예의요, 가르침을 청하는 정중한 표현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렇게 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발을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두 발로 땅을 걸어 다니면서 먼지 묻은 발을 내어 주는 것이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여겨 발을 깨끗하게 닦고 맨발을 내어 얼굴을 대거나 두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여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례는 지금도 인도에는 존재하는 관례입니다. 다른 불교 국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관례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수보제님과 붓다님의 보이지 않는 레이저 광선이 서로에 혼을 비출 것입니다. 두분 사이에 오고 가는 빛이 번개나 벼락보다도 더한 충격, 도끼나 칼, 총, 화살, 핵, 미사일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 교류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조용한 눈으로 본다면 스스로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죽어서 묻힐 무덤을 준비해 놓고 두 분의 빛을 보세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보약을 음미하면서 보세요. 제자 수보제님이 스승, 붓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다, 부탁하고 매달리다, 제 일분의 그런 과정과 절차 환경 속에서 1250명이 모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명상 삼매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 설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 보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은 학교 선생처럼 수업시간을 맞추듯 시간이 되면 저절로 강의,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설법을 해야 할 대상, 시기를 잘 살펴서 말씀 설법을 펴신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어느 때는 사오만명의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아무 말이나 행동이 없이 한나절 즉, 3~4시간씩이나 삼매에 드셔서 침묵하고 아무 설법도 하지 않은 그런 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은 상대를 정확히 보고 그 자가 내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먼저 보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오로지 침묵으로 말을 들을 수 있는 준비 명상에 들게 한 뒤에 살펴서 설법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금강경이 설해지는 이 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거기 모인 1250여명의 모든 대중을 부처님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관찰하고 비추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 표현 없이 오로지 침묵, 명상으로 모두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후에 설법이 필요하면 입을 열어 신중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 이분 [선현기청]이란, 내용이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