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아빠의 행복한 국어이야기

윤슬아빠의 행복한 국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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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그리고 문학 해석 방법... 교육

12/11/2019

뇌와의 대화(부제: 미친놈) -

불쑥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말이란 걸 알지만 '이승헌' 선생님의 책 네다섯 권을 각각 여러 번씩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아 최근 열흘 전부터는 나의 뇌와 적극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사나흘 전부터는 '완벽한 행복'의 느낌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완전하다' '완벽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다. 그것도 하루에 몇 번도 아니고 며칠 내 그 느낌이 계속 되고 있다. 그냥 명상과 기도를 했을 때의 만족도가 100이라면 이건 1000 정도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오늘 윤주와 정도, 둘의 고3 마지막 수업을 행복하게 끝내놓고 음악을 듣고 그냥 사람 구경, 거리 구경을 하고 싶어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대학교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느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냥 상황, 처지, 감정....이런 것 전혀 상관없이 이럴 수도 있구나...하며 그 만족감을 누리며 음악 귀에 꼽고 걷는데......이내 알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 이유를.
그 답은 바로 '뇌와의 대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냥 이승헌 선생이 하라는 대로 했고, 해보니 좋았고, 그랬을 뿐인데.....
행복이란 '뇌가 가장 건강하고 맑은 상태의 느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겪어보니 '뇌'가 상황이나 감정에 항상 민감하게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뇌와의 대화를 통해 뇌를 그 모든 상황과 편도체의 감정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일을 행하고 있었던 거였다. 물론 번연계 및 편도체도 엄연히 뇌 속에 들어있고 뇌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대뇌피질과 번연계와 뇌간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었고 서로 맡고 있는 기능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 분리된 기능들이 서로를 다르게 인지하면서 대화하고 조절하고 타협할 수 있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지금 내 뇌 안에서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화는 주로 내 의식과 '뇌'의 문답 등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나의 뇌가 내게 좋은 일들을 많이 해줘서 나(의식과 몸)도 뇌한테 뭔가 좋은 일을 해줘야겠다 싶어서 일찍 일어나 아침 산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뇌가 가장 좋아한다는 명상을 더 자주 해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뇌에게 얼마나 해롭고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이냐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도 담배 끊는 것은 전혀 자신이 서지 않았고 그래서 뇌에게 말했다.
"나 널 위해 담배를 끊어주고는 싶어. 그런데 자신이 없어. 네가 도와줄래? 네가 방법을 찾아줘...."
아침 산책을 하는 첫날에 그렇게 말했고 둘쨋날 또 그렇게 말했는데 그 둘쨋날 담배가 끊어졌다. 내가 끊은 게 아니라 뇌가 끊게 해줬다는 말이 정확하다. 끊을 수밖에 없는 30년 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져와서 어떤 생각과 느낌을 전해주었고 그 순간 나는 담배가 이미 끊어졌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섬세하고도 자세한 뇌의 작업을 이야기하려면 정말 긴 글 하나가 다시 작성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고 그 느낌이 강해서인지 첫날과 둘쨋날은 금단현상 때문에 힘들 일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난 어제였다. 오전에 체육공원 길을 산책하고 빵 하나를 커피와 먹었는데 불쑥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올라왔다. 그게 너무 강해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어디라도 들어가서 담배를 사버릴 것만 같았다. 내 온 몸이 흡연을 원하는 욕망 덩어리가 돼 버린 것만 같은 그 순간, 내가 깜짝 놀라서 뇌에게 물었다.
"뇌야? 이거 뭐야? 이 느낌,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이렇게 올라오는 거야?"
그러니 바로 뇌가 대답하는 거였다.
"바로 그게 편도체에서 올라오는 거야. 감정이고 욕망이란 거지. 원래 편도체는 나보다 훨씬 센 놈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넌 나보다 편도체 편만 들어주고 살았잖아. 요새 와서 나를 알아봐준 거지......편도체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완전히 네 평생의 습관을 업은 거라서 이기기가 쉽지 않아. 너 이번엔 좀 힘들 거야. 그 놈이 나섰으니...."
내가 말했다.
"안 돼! 네가 좀 도와줘. 내가 이길 수 있게 해줘. 너를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너도 그걸 원하잖아. 그러니 좀 도와줘...."
"그래, 알았어. 사실 아까 네가 이 욕망이 어디서 오는 거야? 라고 물을 때부터 난 웃고 있었어. 그건 벌써 네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 거든. 그걸 알아봤고 분리해서 느끼고 물었다는 거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니까....나도 도와줄게. 네가 덜 힘들도록. 네가 이기도록...."
이 대화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약 10분쯤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아졌고 이 승리가 내게 너무도 커다란 자신감과 평화를 선물해줬다. 그리고 그 뒤부터 뇌와 더 많이 다정다감까지 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완벽한 행복은 그 다음부터 며칠 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홈관리를 안 해서 요새 홈페이지에 오시는 분들도 얼마 없고 특히 이런 시시껄렁한 내 글까지 읽으시는 분이야 더 적겠지만 그래도 혹시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진 않을까....그러나 정말 사실이다. 생생하게 내 뇌와 대화한다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겪는 완전한 행복을 계속 느끼고 있다는 것도.....그리고 수업도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롭게 열정적으로 힘이 나서 한다는 것도.....그냥 걷는 것, 먹는 것, 음악 듣는 것, 하늘 보는 것, 자는 것 하나하나가 생전 처음 해보는 오락처럼 신선하게 다가온다.....그리고 전해주고 싶다. 이 방법과 이 행복의 느낌을.....
날마다 겪고 있는 건데 뇌는 분명한 개성이 있다. 그건 내 뇌의 개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뇌의 개성에 가깝다. 분리해서 겪고 관찰하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거라 확신한다. 뇌는 위대한 능력이 있고 어마어마한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것은 그 방법마저 쉽게 창안해서 반드시 해내는 게 뇌의 속성이다. 그래서 담배 끊는 것뿐 아니라 습관, 태도, 사고방식, 관점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다. 최근 열흘 동안 내가 겪은 것들이 그것이다. 다 바뀌었다. 낮잠도 안 자게 됐고 담배도 안 피게 됐고 화나 짜증도 안 내게 됐고 부정적 생각도 전혀 안 하게 됐다. 걱정, 쓸데없는 되새김, 어중간하게 말하거나 고민하거나 망설이는 것,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 단점을 보는 것....다 사라졌다. 그냥 뇌한테 말하고 부탁한 것뿐인데 뇌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일을 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뇌에게도 약점이 있다. 그 약점까지도 뇌의 개성이다. 뇌는 사실과 허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냥 다 믿는다. 믿고 빠져든다. 공포 영화를 보면 뇌는 무서워한다. 그 순간에 그것이 가짜라는 것, 영화라는 것을 모르는 듯이. 그러나 바로 이 속성을 알고 이용하면 뇌의 이 속성도 강점이 된다. 아직 사실이 아닌 것, 그런데 바라는 것을 사실처럼 말하고 요구하기만 하면 뇌는 그것을 이룬다.
오늘 뇌와 나눈 대화 중 이런 것도 있었다.
"뇌야, 나 복근 가져야겠다. 복근 만들어줘!"
그러니까 뇌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복근? (잠시 따뜻하게 웃은 뒤에) 알았어, 까짓 만들어줄게. 대신 같이 해야하는 거 너도 알지?"
복근은 곧 만들어질 것이다. 뇌가 대답을 했으니까. 신기하게 요새 나는 이러고 산다. 완전 미친 놈 취급 받을 각오하고....그러나 쓰지 않고 배길 수가 없어서 쓴다......

22/01/2018

시를 해석하는 방법이 곧 생을 사는 방법이었다니!

관찰하는 자아, 관조적 삶의 자세, 화자는 지금 뭐하고 있지? - 화자는 지금 뭐하고 있어? 세모 상황은 뭐야?
몇 년간 내 시 수업을 관통하고 있는 질문이다. 내 수업을 한 해라도 들었다면 아마도 수백 번은 듣고 스스로도 발음했을 질문이고 그래서 어느 날 어른이 되어 시를 보게 되면, 한 번이라도 '화자'라는 말을 듣게 되면 '화자가 지금 뭐하고 있어?'하고 물었던 내 목소리를 떠올릴 법도 하다.
모든 시는 화자의 목소리와 시선을 빌려 말해진다. 화자는 무언가 대개 안 좋은 사건과 경험을 깔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적 세모 상황 속에서 무어라도 해결해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게 내가 읽어낸 모든 시의 공통점이고 핵심에 이르는 길이다. 이 질문과 그 대답을 통해서 학생들이 처음 본 시의 핵심에 스스로 다가가기를 훈련한다. 화자는 자기의 경험을 관조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해결방법을 찾는다. 그 해결방법은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것일 때가 더 많다. 여기서 한 단계만 시야를 넓혀 관조해보자. 화자는 자기의 경험을 관조함으로서 자기의 해결방법을 찾아 제시하지만 그 시를 해석하는 우리는 바로 그런 화자의 관조와 해결 과정을 한 단계 더 바깥층에서 관조하고 관찰한다. 다시 말하자면 화자는 자기의 경험을 관조하지만 우리는 그 화자를 관조한다. 아, 이 화자는 이런 안 좋은 일을 겪고 이렇게 해결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2차적으로 다시 관조하는 것이다. 가히 관조의 관조라고 할 만하다. 곧 시의 해석이란 관조에 대한 관조라고 할 수가 있다. 관조 중의 관조를 연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 해석뿐만 아니라 인생을 해석하며 사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세상과 자기의 경험에 빠져 허덕거리지 않고 관찰하는 자세를 키워준다.
우리는 여러 개의 자기 자신을 느끼며 살게 되어 있다. 두 개의 자아, 세 개의 자아, 그 이상의 자아를 느낀다. 그러나 조금 단순화시키자면 다음 두 개의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는 자아가 있는 반면 그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는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자아가 있다. 인간이 일기라는 것, 수필 편지 등을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자아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개는 밥을 먹지 그 밥을 먹는 자기를 관찰하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관찰하는 자아가 따로 있다. 불교철학에서는 이 관찰하는 자아를 참나, 진정한 자아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모든 순간의 행동과 동작을 함에 있어서 이 두번째 자아를 의식하면서 하라고 한다. 그것을 깨어있는 삶이라고 한다.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 차를 마시는 자기자신을 알고 의식하면서 마시라는 것이다. 머리를 감으려고 머리카락에 따뜻한 물을 부을 때 그 행위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그 따스한 물이 지금 내게 어떠한 촉감을 주고 있는지 생생하게 잘 느끼면서 물을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를 관찰하는 자아로서 다 의식하고 하면 모든 순간 깨어있게 되고 그러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온 우주가 다 열리는 체험을 하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불교에서는 '정념'이라고 부르고 깨어있는 삶이라고 한다. 비불교적으로는 '완벽한 관조의 삶' 정도가 될 것이다. 슬픔을 느끼되 그 슬픔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동시에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이다. 호흡을 하면서도 그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하는 자아와 함께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집착과 초조와 고통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깨달았다는 스님들의 글을 접하며 나 역시 노력을 해왔다. 모든 순간, 항상, 완벽히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히 어려웠다. 하지만 이 노력과 수행은 되는 만큼씩 정직하게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준다는 확신은 갖게 되었다. 조금 더 되면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연습하고 있다. 사는 자아로서 열심히 살되 그 사는 자아를 관찰하는 자로서 나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고 얼마쯤 그 능력이 키워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최근엔 글을 쓰는 것도 그관찰하는 자아로서 그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쓴다. 쓴다는 행위 자체가 바로 거울을 통해서 나를 관찰하는 것과 같으니까. 나는 선생이기 때문에 내개 해보니 좋다는 것을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전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살되 관찰하는 자아로서도 동시에 살아라. 지금 네가 뭐하고 있지? 하고 수시로 끝없이 물으면서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일을 하는 시간을 늘려라.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 하고 묻고 나는 지금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정확하게 정직하게 잘 내려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하고 대답해보아라.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게 점점 더 습관이 될수록 관조적인 삶을 얻고 유지할 수가 있고 그럴수록 의미롭게 살 수 있고 시간이란 게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의식밖에서 흘러버리는 일이 줄 것이다. 느끼고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다, 이렇게 말해주는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서 이 질문, 이 시 수업도 더 의미로워졌다. 화자는 지금 뭐하고 있지? 이 화자가 처한 세모 문제상황은 뭐지? 그렇게 시를 해석하듯이 바로 너의 삶도 해석해가면서 관찰해가면서 살아가면 돼.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 내가 처한 지금의 이 세모 상황은 어떤 문제점이 있는거지? 그렇게 묻기만 해도 이미 해결은 시작된 것이다. 결국 시를 제대로 해석하고 관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제대로 해석하고 관조하는 비결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18/01/2018

5년 전 첫 내 학원 내 공간을 꿈꾸던 시절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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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 봄이 되면

날씨가 일할 만큼 따뜻해지는 3월 1일이 되면
범어사 부모님집으로 날마다 쪼르르 달려갈 것이다.
먼저 일주일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좋은 비와
.. 빗자루, 쓰레받기와 걸레를 준비해서 집 안과 마당을
깨끗하게 치울 것이다.
도배도 새로 하고 바닥 장판도 새것으로 깔고 새 커텐도
달 것이다. 그런 다음 커다랗고 예쁜 책꽂이를 짜와서 거실에
세울 것이다. 그 책꽃이에 맨처음 박완서문학 전집을 사서
꼽아 놓을 것이다. (물론 중고로)
그 다음엔 내가 가진 책들 중에서 많은 걸 버리고 꼭
간직하고 싶은 책들만 가져가서 그 책장을 채울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노력하면 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누가 나를 말린다 해도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달려가고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오래 그곳에서 머물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아예 거기에서 눌러 살기 위한 궁리를 하면서
거기에서 먹고 살 방도를 찾게 될 것이다.
섬세하고 부지런한 박완서만큼은 택도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싶은 만큼은 소박하게 꾸며서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르는 공간으로 만들어서 음악과 함께
글쓰며, 일주일에 며칠쯤 다른 곳으로 강의 나가면서
살 것이다. 그래 딱 한달 만 고생하면 된다.
살고 싶을 만한 공간으로 나를 유혹할 만하게 만들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다음은 내 평생의 소원과 욕망이 하루하루
나를 그리로 이끌고 갈 것이다.

11/01/2018

김춘수
- 깊고 넓은 감수성(感受性)의 바다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손길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김춘수 전문

하나씩 차근차근 질문해볼 테니까 그 질문과 같이 시 내부로 들어가 보자.
우선 전체의 흐름을 잡을 수 있는 질문 하나,
화자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능금에 대한 시지만 능금 말고 화자 말이야.

“잘 익은 능금을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맞아. 정확했어. 시 전체의 구조를 다 보여주는 건 딱 1연 뿐인데 바로 거기에서 화자(우리들)는 능금을 손에 들고 있어. 익어서 너무 잘 익어서 저절로 떨어진 능금을. 그 외 나머지는 그 익어가는 과정과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라 볼 수가 있어.
시는 먼저 이렇게 큰 구조와 사실적인 것부터 읽어내는 게 좋아. 그것이 중심축이 되어 나머지는 그것과의 관계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니까. 그 중심인 큰 줄기를 읽어냈으니 이미 절반 이상 해석이 된 거야. 이제 남은 것은 그것과 관련짓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럼 이제 이 ‘관련성’을 염두하고 세부적인 모습을 조금 들여다볼까?
우선 방금 능금이 익었다고 했는데 시에서는 능금을 익게 만든 게 뭐지?

“ 그리움이요!”

그래, 어째 좀 이상하긴 하지만 시는 아주 분명하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 그리움에 살고 그 그리움이 익어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되어 우리들 손바닥에 떨어졌다고 했으니까. 그럼 거꾸로 다시 물어볼게. 이 그리움은 뭘까? 내가 이렇게 물으면 이젠 그리움을 중심으로 그 옆에 있는 시어들과 관련지어 다시 대답하면 되는 거 알지?

“능금을 익게 만드는 이유요!”

와우, 오늘따라 너무 잘 한다. 아니, 쌤이 질문을 잘 하는 걸까?ㅎㅎ 아무튼 질문마다 이렇게 적극 대답해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묻는 것마다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니 너무 편하고 좋다.
그래, 맞아. 그리움은 능금을 익게 만드는 힘이야. 그리움이 능금을 잊게 만들다니,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첫인상부터 시가 낯설게 느껴졌겠지만 애초에 시라는 것이 ‘능금’이라는 사물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뿐이고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이야기로 받아들이면 그리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어.
다시 말해 우리의 상식으론 그리움이 ‘능금’을 익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사람’은 익게 만들 수 있다는 거지. 여기에서 그리움은 모든 사람을 익게 만드는 힘으로 원인으로 제시된 거야. 능금이 익는다는 것은 사람이 성숙한다는 것이고 그러니 그리움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동력이라는 거야.
그러고 보면 이 그리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움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것 같네. 우리의 상식보다 시의 내용과 더 밀접하게 관련지어서 성숙하게 만든 힘이라는, 바로 그 제한 속에서 해석하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리움이란 능금을 과일의 살과 과즙으로 더 밀도 있게 채워서 익게 만드는 것처럼, 성숙과 채움(시에서는 충실)을 부르는 간절한 결핍이야. 그리움은 물을 채워 과즙으로 만들고 싶은 갈증, 능금 내부에 조밀한 속살을 채우고 싶어 하는 열망처럼 우리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고자 하는 주체적인 바람이야. 그것이 2연에 와서는 충실을 이루어내는 ‘아쉬움’이라는 시어로 드러나 있고 3연의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까지 연결되고 있어. 그렇게 보면 이 그리움은 자기의 내적 성숙을 이루어 내기 위한 모든 경험과 감정에 대한 열망인 거야.
물론 다른 한편으론 ‘그리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 시를 해석해볼 수도 있겠지. 능금을 익게 만드는 그리움이라면 ‘능금’ 입장에서는 과연 무엇에 대한 그리움일까. 당연히 능금이 익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겠지. 충분한 햇살에 대한 그리움, 바람 그리고 비에 대한 그리움 등이 될 수 있겠지. 거기서 출발해도 결국은 현재의 ‘아쉬움’과 결핍감에서 비롯되는, 그것을 해소하고 채우고자 하는 소망에 닿을 수밖에 없어. 결국 능금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졌다고 하는 그 ‘스스로’에 와서는, 게다가 3연의 ‘감정의 바다’까지 와서는 완전히 인간의 문제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까.
자, 그럼 이 시가 비춰주는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비춰보고 이제 우리 문제로 돌아와서 성숙의 비결을 좀 배워 보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능금처럼 우리도 익어볼 수 있을까?

“그리움이요.”
“결핍과 갈증!”

그래 맞아. 우선 성숙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정말 원하는 자기 모습을 만들어 가지려는 갈증이 있어야겠지. 해를 부르고 바람과 비를 부를 정도의 강력한 갈망이 있어야 하는 거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갈망이 ‘스스로’의 것이어야 한다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성숙을 뒷받침하고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지금 너희들에게 다 있는데 바로 그게 3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야. 아직 익기 전의 모습인 ‘푸르게 고인’ 내면에 바로 그 감정의 바다가 너희들에게 있어. 능금이 햇살과 바람과 비를 그 열망만큼 흡수해내듯이 뭐든지 다 흡수할 수 있는 너희들의 그 황금 같이 소중한 감수성(感受性), 바로 그것 말이야. 바로 거기에 ‘익음’ ‘성숙’의 비결이 있는 거야.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어서(깊고 넓으니까) 어떤 경험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도 되는 젊음(푸르게 고인)이 가진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
넓고 깊은 바다라 말하는 그런 무한한 능력의 감수성이 있으니 어떤 일이든지 좀 겪어도 되는 거야. 가끔은 많이 아프고 상처도 좀 받아도 돼. 다만 그걸 익히고 소화해내서 견딜 수 없는 자기만의 빛깔과 향기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 감수성 곁에 그것을 어루만지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성찰이 같이 구비된다면! 원래 알짜 경험이란 순류(順流)보다는 반항적 역류(逆流)이고 뭔가 충격적이면서 통증을 좀 수반해야 하는 거야. 회초리 같이 따끔하고 확 깨는 면이 있어야 제대로 된 영향소가 되는 거지. 그래야 좁디좁은 자아가 깨지고 뭔가 무너지기도 비워지기도 할 테고 그래야 뭐라도 배우고 익을 수가 있지. 그쯤 되는 경험이어야 그것으로 견딜 수 없는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익어가는 것이야말로 능금처럼 우리에게도 유일한 과제지. 그럴 때에만 온 하늘이 너희의 그 생명력을 축복할 수 있고(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극과 감동(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줄 수가 있는 거지.(3연) 그러니 앞으로는 너희들이 아프고 힘들 때 한 가지만 더 생각해.

그래, 아프다. 힘들다. 정말 쉽진 않다. 근데 이 정도는 되야 경험인 거지. 이쯤은 돼야 날 익히지.

마지막 3연의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는 그 시구의 위치상 능금에 대한 서술로 볼 수도 있고 그 능금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에 대한 서술로 볼 수도 있어. 앞으로도 뒤로도 관련지을 수 있는 위치니까. 아마 시인은 그 둘 다가 필요해서 이 위치에 넣어 독자에게 넘겨줬을 거야. 그 때문에 시의 매력이 배(倍)가 되었으니까.
시에서 능금의 목적은 오직 채우고 익고 충실하게 되는 거야. 그러니 이 시야 말로 그 충실, 충일, 성숙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 물결치는 감정의 바다를 갖고 있는 너희들을 위한 거야. 그러므로 이제부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 모든 세모들이 다 너희들을 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니까! 세모야말로 멀리서 봐도 선연히 드러나는 너희들만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더하게 해준다는 것을 이 시의 응원까지 받으며 이제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겁내지 말고 그 눈부신 감수성 많이 사용해서 더 간절히 원하고 갈증하고 느끼고 배우도록 하자! 절대 기죽지 말고!

04/01/2018

다시, 강의는 연극이다
- 좋은 강의와 수업에 대한 고민의 발자취

라는 글을 쓸 무렵엔 J학원에 있었다. 원장과 몇 명의 관리자에게 가장 미움을 받았고 학생들에겐 과분한 사랑을 받던 때였다. 강의가 연극이고 내가 배우라는 사실, 그것은 나의 동력(動力)이자 철학이었다. 대상을 좀 더 쉽고 재밌게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추는지도 모르게 춤을 추었고 노래 부르기도 서슴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면 저절로 ‘나’(자아)는 사라졌고 내 관객들의 눈빛들만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긴 시간 동안 학교에서 지칠 만큼 지친 후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관객들을 실컷 웃게 해주는 것, 마주침으로 머릿속 섬광들을 밝혀주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요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 눈빛과 표정, 손동작 하나에 예민한 촉수를 겨누며 나는 늘 방화(放火)를 꿈꿨었다. 그날 교과 내용에 따라 연극의 소재는 달랐으나 나의 한결같은 주제(목표)는 늘 내 관객의 지적호기심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에 성공하는 날이면 나는 햇살처럼 환한 마음으로 분필을 던지고 교실을 나오곤 했었다. 원장과 간부들이 아무리 미워해도 나를 쫓아낼 순 없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학생 대다수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는 선생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반골적(反骨的) 기질 때문에 4년 만에 쫓겨났고 나는 단 한 명의 학생들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내 홈페이지를 폐쇄시켜달란 황당한 주문까지 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그 부탁은 거절했지만 타협은 이루어져 보름동안만 홈페이지를 닫아두었다.
라는 글은 그 다음의 직장인 B학원에서 썼다. 여기선 선생님들과도 학생 모두와도 매우 잘 지냈다. 본원이 아니라 막 개원한 학원인 분원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내 손으로 일일이 전단지를 뿌려가며 모아서 처음부터 만나게 된 학생들이었고 그 만큼 정이 깊었다. 그래서 더욱 자발적인 일벌레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췌장암으로 죽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받았던 제자들의 그 수많은 위로의 글들은 아직까지 내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담겨 내 생애 끝까지 안고가야 부채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갑자기 엄마 없이 살게 된 다섯 살 세 살의 딸과 아들을 위해 집으로부터 그리 먼 곳에서 오전부터 거의 새벽까지 전임으로 일했던 그 학원은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많은 위로의 편지들을 써준 바로 그 제자들에게 직접 갚을 순 없게 되었지만 내가 만나는 모든 학생들에게서 나는 그 빚을 생각하곤 한다.
학생들을 깊이 사랑할수록 나는 내가 배우가 되어선 곤란하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화려한 수업을 해도 학생들의 성적은 쉬 달라지지 않았다. 국어를 좋아하게 되고 국어 시간을 기다려주었지만 성적은 더디게 더디게만 올랐다. 나는 철학을 바꾸고 수업 방식도 변경했다. 배우가 아니라 연출가가 되기로 했다.
모든 걸 연극처럼 재밌고 화려하게 설명하기보단 스스로 하도록 유도하고 자극을 주고 잦은 테스트로 훈련하며 늦게까지 자습을 시켰다. 새벽에 들어와선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격려의 편지를 썼다. ‘이번 시험 기간 내내 수고했다고, 조금만 더 힘내자고, 너 오늘 참 멋있었다.’고.
나는 과로 속에서 날마다 더한 과로를 결심했다. 과로는 내가 했는데 아내가 쓰러졌다. 외로움의 병이었던가, 그녀는 나무꾼처럼 일만 하는 내게 아이 둘을 남기고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정신 못 차리고 멍하게 지낸 한동안을 보내고 다시 일해야만 했을 때 나는 ‘돈’보단 ‘시간’을 탐내게 되었다. 시간강사가 되었다. 전임보다 더한 전임으로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소풍 온 듯 시강으로 드나드는 것은 내게도 동료들에게도 불편한 일이었다. 다시는 ‘일’과 ‘생’을 바꾸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아빠인 나는 ‘엄마’가 되기 위하여 B학원을 떠나왔고 그때 난 강의에 대한 내 열정마저도 같이 버렸다.
아내의 죽음은 내 피를 통째로 바꿔버린 것 같았다. 인생관도 성격도 다 변했다.
모두를 웃기던 내가 이제는 아들 딸 앞에서만 웃고 웃긴다. 요즘도 수업 시간을 빼곤 하루 열 마디도 안 하고 퇴근하는 날이 많다. 내게는 나를 수다쟁이와 장난꾸러기로 기억하는 과거의 동료들과, 벙어리가 아닐까 궁금해 하는 현재의 동료들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일을 시작한 지금의 D학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조용하고 성실하고 성적이 아주 좋은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두 곳의 개원학원을 거치면서 나는 시끄러운 농땡이들, 공부는 못 하지만 성격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들과 뒹굴며 살아왔었다. 그런 친구들을 강의실에 30명 40명쯤 모아놓고 겨울에도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배우처럼 강의하는 것, 아, 얼마나 충일했던 순간이었던가! 그러나 이젠 학생들 따라 나 역시 조용하고 성실해졌다. 소리 지를 일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많은 과제를 내주어도 이 성실한 친구들은 다 해왔고 나는 그 풀이만 잘해주면 되었다. 뭐, 문제는 없었다. 연출가는 배우가 아니니까.
수업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참으로 감사하게도 제자들은 그 조용함을 따스함으로 받아들여주었고 이전의 제자들처럼 나를 좋아해주었지만 그러나 솔직히 썰렁하고 힘없는 수업이었다. 이제 나는 과로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삶의 무게 중심은 수업에서 육아와 글쓰기로 옮겨졌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괜찮았다. 대개는 괜찮았다.
그러나 가끔은 미칠듯한 허전함과 서글픔이 찾아오곤 했다. 배우였을 때의 광기와 몰입과 과로가 그리워지면 어린 아들 딸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는 일에 미치지 않기로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래, 지금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한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마음을 잡고 또 잡으며 아이들과 셋이 있는 순간만이라도 명랑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했다. 몰입과 광기가 없다고 생기까지 잃을 필요는 없잖은가! 그러나 그 생기란 게 혼자만의 결심 같은 걸로 되찾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새벽에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영화 속 알파치노의 충혈된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신문기자라는 자기 직업에 미친 광기의 그 눈! 그 앞에서 나는 온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그건 지독한 부러움이고 그리움이었다! 그 뒤 몇 주 동안 알파치노가 나오는 영화를 샅샅이 뒤져 보기 시작했다. 시리즈도 다시 보고 등을 보았다. 마음 한 편으로는 그냥 문득 그가 좋아져서라고 생각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잃어버린 내 모습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부인할 수가 없었다. 영화 속의 알파치노는 항상 충혈된 눈빛으로 일에 미쳐있었다. 그는 광기의 캐릭터였고 과로와 애정 결핍의 사내였다. 바로 그 과로와 광기와 몰입이 미치도록 그리웠던 거였다……
오늘 논술 네 시간 수업을 하고 돌아왔다. 오랜 만에 나는 배우로 돌아갔다. 지난 주 수업 때 나는 몹시도 버벅거렸고 무력한 수업을 했다. 그게 일주일 내내 괴로웠다. 나는 내 속 매우 깊숙하게 박혀버린 알파치노를 끄집어냈다. 연기에 미친 배우처럼, 수업 역을 맡은 알파치노처럼 내가 어떻게 수업했는지도 잊을 만큼 퀭하게 충혈된 눈으로 침을 튀기며 열강을 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만족감 속에서 분필을 던지고 나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제자가 ‘선생님 오늘 수업 너무 재밌었어요. 네 시간이 너무 짧고 행복하게 느껴졌어요.’ 라고 말해주었을 땐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았다. 돌아오면서 나는 내 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느꼈다. 잘 된 수업 하나가 오늘밤 나로 하여금 별을 보게 하였고 시원한 가을밤 공기 아래서 한참을 떨며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다시, 강의는 연극이다.
그래, 강의는 연극이다. 나는 배우다.
일하고 싶다. 다시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

Photos from 윤슬아빠의 행복한 국어이야기's post 20/12/2017

가족....

28/09/2017

세모 속에서 동그라미를!
- 시(詩)를 통한 인생의 예행 연습

세모 속 동그라미. 시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배우게 될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 ‘세모 속에서 동그라미를 찾아내는’ 강력한 알고리즘(반복되는 규칙이나 틀)이라고 생각해. 그 어떤 세모 속에서도 반드시 나름의 동그라미를 찾아내는 정신과 태도, 이것이야말로 시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핵심이야. 여기서 세모는 화자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체험을 의미하고 동그라미는 그 세모를 상대하는 화자의 반응 중 긍정적인 정신과 태도, 방법을 뜻해. 세모는 전쟁,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의 억압, 분단, 사별, 정체성 상실, 무기력, 절망 등 외부와 내면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 모든 시련, 고통, 슬픔의 상황이지. 반면에 동그라미는 의지, 저항, 희망과 꿈, 도전, 극복, 인식 전환, 웃음, 유연성, 인내, 내적 성숙, 깨달음 등이 될 수 있겠지. 우리의 삶이 자질구레하고 고통스런 세부 사항으로 구성 돼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시 역시 수많은 세모 상황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어. 시인의 위대함이란 것도 그 어떤 극한의 세모 상황 속에서도, 마치 고양이에게 꽉 막힌 구석 쪽으로 몰린 쥐처럼 된 상황에서도, 반드시 동그라미의 가능성과 방법을 찾아내서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와 인생이 만나는 거야. 세모를 피할 수는 없어.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을 통해 어떤 동그라미 반응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거지. 자, 이쯤에서 시를 하나 꺼내서 그 점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김수영 시인의 그 유명한 이야.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화자는 시 속에서 흐린 날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바라보며 그 풀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어. 이 시 속에 담겨있는 세모 상황은 뭘까? 그래, 날이 흐리다는 것, 그리고 풀을 자꾸 눕게 만드는 바람(동풍)이 끊임없이 분다는 것이지. 또 그 바람에 의해 풀이 자꾸 누울 수밖에 없고 심지어 울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 한 마디로 ‘풀’에게 지금의 삶이 몹시 힘에 부칠 만큼 고통스럽다는 거지. 그렇지만 어쩌겠어? 상대해야 하는 세모가 흐린 날이고 바람인데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겠어? 피할 수가 없지. 이처럼 바람은 피할 수 없어서 끝없이 상대해야만 하는, 정말 만만치 않은 세모야. 그리고 그게 바로 시와 삶에서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많은 세모들의 특징이야. 피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매우 강력해. 그 바람이 힘들고 지겨워서 어느 날 ‘풀’이 이렇게 결심한다고 치자.

이제 다시는 바람과 마주치지도 상대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이제부터 절대 넘어지지도 울지도 않겠어!

풀이 만약 그런 결심을 한다면 이게 현명한 것일까? 그리고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렇지 않아. 세상을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눈을 맞는 날도 생기지. 그리고 그것은 대개 갑자기 내릴 때가 많아. 하물며 바람은? 단 한 번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있을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지 않을 순 있어도 바람은 불게 돼 있어. 시인은 그래서 더 ‘바람’이란 시어를 택했을 거야. 절대 피할 수 없는 바람을 상대하는 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바람이라는 세모를 너희들의 생활 버전으로 번역해볼까?
바람이 불어서 비가 내려서 날씨가 우중충해서 기분이 안 좋아서 친구 생일이라서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라서 크리스마스 석가탄신일 주말이라서 시험 끝난 날이라서 학생회의가 있는 날이라서 수련회를 갔다 와서 왠지 집중이 안 되는 날이라서 날이 너무 더워서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어서 남자친구가 날 섭섭하게 해서 우리 사귄지 100일이라서 싫어하는 과목이 몰려있는 날이라서 담임선생님이 맘에 안 들어서
이런 모든 것이 다 바람이야. 그러니 그것을 전부 피할 수는 없지. 결국 모든 날이 될 테니까. 이렇게 바람 핑계를 대개 되면 모든 날이 다 공부하기 싫은 날이거나 못하는 날이 되겠지.
아무튼 이제 풀을 통해서 시인이 제시하는 동그라미도 볼까? 풀은 어떻게 하고 있어? 어찌 보면 매우 쿨한 것 같기도 하지만 반대로 겉모습만 보면 좀 찌질한 것 같기도 해.
풀은 바람을 향해 화를 내거나 강하고 거세게 대들지는 않아. 그냥 적당히 넘어져 주며 일어나기만을 반복하지. 너무 힘들 땐 조금 울기도 하지만 그때도 곧 스스로 웃어 내. 이건 ‘바람’이라는 세모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야. 바람을 상대하는 풀의 대응방법은 바로 ‘유연성’과 ‘순발력’이야. 그 부드러운 유연성이 엄청난 투지와 오기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야. 바람이 보여주는 그 유연성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동그라미야. 넘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아니라 숱하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며 또 넘어지면서도 금세 잘 일어나는 모습이지. 다시는 바람을 마주하지 않을 거야, 라든지 내가 바람을 확 꺾어 이겨버릴 거야, 하는 강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이라는 세모와 함께 살아갈 작정을 한 듯 바람이 불면 언제나처럼 잠시 누웠다가 이번엔 그 바람에게 약까지 올리듯이 그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이 기막힌 태도! 시인은 이 ‘풀’의 모습을 통해서 그 유연성과 투지의 동그라미를 보여주고 있는 거야.
하나의 시를 통해서 살펴봤지만 매우 많은 시가 이처럼 제 각각의 세모와 그 세모의 성격을 제대로 통찰해서 발견해낸 최고의 동그라미를 숨겨놓고 있어. 이번엔 아예 그 세모 속에 동그라미가 들어앉은 시 하나만 더 볼까. 역시 너희들이 잘 아는 이육사의 이야. 의 ‘바람’만큼 지속적이진 않지만 훨씬 더 강력하고 험악한 세모 상황을 보여주지. 제목처럼 그야말로 극한 상황의 절정이야.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전문

잘 알고 있는 대로 1연에서 화자는 점점 더 추운 곳으로 수평적 끝 – 북방- 까지 쫓겨 왔고 2연에서는 아예 수직적 끝까지 올라 고원 그 맨 꼭대기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 있어. 시를 보니 신 앞에 기도를 하고 싶어도 무릎 꿇을 공간조차 없는 곳이네. 지금 간신히 딛고 서 있는 공간 외에는 단 한 발짝도 내딛을 곳이 없지. 말 그대로 극한 상황이고 절정인 거야. 물리적으로는 이 상황을 피하거나 그것에 맞설 그 어떤 도구도 방법도 없어 보여. 북방 겨울의 그 혹독한 추위에, 게다가 산의 절정 위에서 숨을 곳도 가릴 것도 없이 서 있으니 그 자리에서 얼어 죽는 일만이 남게 된 상황이지. 과연 이런 세모 속에서도 동그라미가 있을 수 있을까. 동그라미는커녕 한 줌의 햇볕이라도 들어올 수 있는 쥐구멍만한 숨통이란 게 있기나 할까. 그러나 시인은 이 극한 상황에서도 아주 분명한 극복 방법과 동그라미를 제시해. 극적 상황이니만큼 더 대단한 극적 반전이야. 여러 번 배운 시니까 그 동그라미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 줄 알지? 그래, 바로 여기지.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중에서 시인이 제시한 방법은 여기에 숨겨져 있어.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이게 왜 극복 방법이 돼? 시인이 알려주는 그 방법이란 게 뭔데?
바로 ‘성찰’이야. ‘눈 감아 생각’하는 거지. 현실적 물리적으로 그 어떤 돌파구도 없어 보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생각’을 통한 발상의 전환이야. 땅에서 모든 적과 시련에 포위가 된 상황이라면 마지막으로 하늘을 봐야 하듯이. 실제로 화자는 눈 감고 생각한 뒤 깨닫고 나서 전혀 새로운 눈으로 하늘을 봤어. 지금은 눈이 내리지만 하늘 저 너머에서 햇살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이 시에 그런 게 어디 있냐구? ‘무지개’란 시어가 그렇잖아. 무지개란 언제 생기는 거니? 비나 눈이 온 뒤 해가 떠야만 볼 수 있는 게 무지개지. 화자는 ‘성찰’(눈감아 생각)을 통해 이 북방의 강추위를 몰고 온 현재의 눈보라 속에 미래의 무지개도 숨어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눈을 감은 거야. ‘눈 감고’는 지금 내 앞에 딱 버티고 있는 이 엄청난 세모 상황에 감각적(시각)으로 함몰되지 않고 다른 공간(저 눈보라 뒤), 과거(눈보라가 닥치기 전)와 미래(눈보라가 그친 후)도 함께 인식하려는 행동이지. ‘눈 감아’ 이제껏 살아오면서 영원히 내린 눈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 ‘눈 감아’ ‘생각’한 뒤에 실제로 저 눈보라 뒤 먼 하늘을 통해 무지개의 전조(前兆), 어렴풋한 햇살을 봤을 수도 있겠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생각’ ‘인식과 발상과 시각’의 전환만이 외부의 극단적인 시련 앞에 서 있는 자에겐 최선의 극복 방법이고 바로 그게 이 시에서 배울 수 있는 동그라미야. ‘눈 감아’를 통해서는 거인의 모습으로 눈앞에 떡 버티고 있는 부정적 세모만 보고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심지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해서 두려움에 빠지지 말아야 함을 배울 수 있고 그 다음 ‘생각’을 통해서는 그 어떤 막다른 골목(절정)에서도 발상의 극적인 전환은 가능하고 그게 이루어질 때 이전까지 자기 시야에 갇혀 전혀 볼 수 없는 방향과 방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어. 바로 그 때문에 ‘끝’ ‘꼭대기’를 뜻하는 이 시의 제목인 ‘절정’은 시련에서도 ‘절정’이지만 그 극복에 있어서도 ‘절정’이 되는 거야. 이런 현실적 극한의 세모 속에선 생각의 전환, 이보다 더 절정의 동그라미는 있을 수 없다는 거지. 그 두 극단의 절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역설법의 대표 문장으로도 잘 외우고 있는 이 기막힌 구절이 나오게 된 거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거야 말로 세모 한가운데 동그라미가 있다는 거야.
아니 그 보다 더 하지. 무지개라는 동그라미의 구성 요소가 아예 세모라는 강철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말은 강철이라는 세모가 없으면 무지개가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잖아. 강철이 그 재료이고 무지개는 그 재료가 있어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니까. 이는 또 우리에게 겉으로 세모로 보이는 것 속엔 반드시 동그라미가 들어있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어. ‘강철로 된 무지개’는 껍질은 강철이고 그 알맹이가 무지개란 뜻이니까.
아, 이런 깊은 통찰력을 바로 ‘눈 감아’ 와 ‘생각’을 통해 얻었던 거야. 화자가 수평으로 수직으로 끝까지 도망쳐온 그 겨울의 강추위 바로 그것이 강철로 된 무지개 자체였고(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겨울 = 강철로 된 무지개) 한편 겨울의 추위는 이 혹독한 강철 속에 무지개가 들어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매개체가 되는 거야.
겨울, 강철, 이게 바로 너희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모든 시련이자 세모인데 시련,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바로 그 세모 강철 같은 단단한 시련 안에 너희들이 가장 탐낼 만한 동그라미인 무지개가 들어 있다는 거지. 현재의 세모 속에는 미래 너희들의 그 빛나는 성숙함이 들어 있고 깨달음과 넓어짐 강해짐의 기회들이 들어있는 거야. 그러니 겁나는 게 뭐가 있겠어? 세모 속에 바로 우리가 갖고싶은 동그라미가 들어있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
이처럼 두 편의 시를 통해 분명하게 봤듯이 제대로 된 세모를 피하기만 한다면 제대로 된 동그라미도 가질 수도 없어. 지독한 갈증 뒤에라야 한 모금의 샘물이 달디 달듯이 세모가 고통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불행이거나 재앙은 아냐.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지.
며칠 전 라는 예능프로를 보니 거기에선 세모를 이겨낸 자에게 아예 눈에 확 띠는 동그라미(드레곤볼)를 주더라구. 굶주림, 갈증, 길 헤매기, 배신하거나 속이기, 겨울에 얼음물에 뛰어들기, 한 데서 자기, 모기와 싸우기, 어려운 퀴즈 등의 곤혹스런 미션들 즉, 세모의 관문 하나를 통과해내면 동그란 드레곤볼을 하나씩 주더라. 어떤 때는 개인에게 주기도 하고 가끔은 전체에게 주기도 하는 것까지 그게 시나 삶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단 생각에 아하, 하고 손뼉을 쳤지. 세모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삼성, 사성, 칠성까지의 더 좋은 드레곤볼을 주는 것까지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그걸 보며 그래 바로 저 드레곤볼이란 상징을 이용해서 수업에서 더 분명하게 이 세모와 동그라미의 관계를 전해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박수를 쳤던 거야.
신서유기나 수많은 시(詩)처럼 너희들도 하루치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그날의 세모들을 마주할 테니까 바로 그때 이걸 명심해! 바로 지금이 기회다, 칠성의 드레곤볼을 차지할 기회다, 이 세모야말로 동그라미 중의 동그라미를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걸 바로 알아보고 그걸 찾아 가져야겠다, 이것을! 세모 속에 반드시 동그라미가 있다는 것, 이마가 세모인 것은 분명 그 뒤통수쯤에 동그라미를 감춰놓은, 괴물인 척 연기하는 요정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니 ‘세모 속에서 동그라미를 찾는’ 끝없는 과정, 바로 이게 쌤이 생각하는 인생이고 그걸 아름답게 압축된 언어로 오래 기억할 수 있게까지 해주는 게 바로 시(詩)야! 알고리즘은 반복 변주되는 틀이자 규칙이고 상징이야. 시(詩)라는 작은 방 안엔 반드시 세모와 동그라미가 함께 들어있고 그 세모와 동그라미의 긴장 관계가 시에서 반복 변주되듯이 우리가 아등바등 사는 이 세계의 규칙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세모 속에서 동그라미를 찾는 알고리즘의 눈으로 시를 해석하며 연습하는 것은 날마다 그 세모를 마주하고 실제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게 너무도 훌륭한 예행(豫行) 연습이 될 수 있는 거야. 시 수업은 곧, 잘 사는 연습인 거지.

28/09/2017

차례
1부 윤슬아빠의 행복한 시 이야기

1. 세모 속에서 동그라미를!
- 시(詩)를 통한 인생의 예행 연습
2. 고은
- 걷는다는 것의 의미와 함께
3. 김춘수
- 깊고 넓은 감수성(感受性)의 바다
4. 김춘수
- 본질 파악의 어려움과 깊어만 가는 지적호기심
5. 박재삼
- 비극적 인생에 관한 기막힌 정의
6. 박재삼
-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엄마와 누나의 울음
7. 김남조
- 빨래처럼 깨끗해지고 싶은 새해 첫 날
8. 박남수
- 시와의 입체적 마주침
9. 김현승
- 완전한 사랑을 위한 절대 고독
10. 유치환
- 깃발과 푯대, 도달할 수 없는 꿈에 대한 몸부림
11. 조지훈
- 번뇌 속에서 만나는 황홀한 별빛
12. 김광규
- 쓰레기 세상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아내기
13. 신동집 ‘오렌지’
-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
14. 서정주의 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15. 서정주
- 사랑이라는 엄청난 사건, 그 신내림의 황홀!
16. 서정주
- 아무리 아파도 멈출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
17. 서정주
- 벼락과 해일을 뚫어야 도달할 수 있는!
18. 곽재구
- 고통스런 생에 대한 서정적 묘사
19. 김영랑
- 그대를 위해 숨겨놓은 내밀한 고독
20.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지쳐있는 고3 제자들을 위하여
21. 릴케,
- 이제는 방황을 끝내야 할 때
22. 프로스트
- 인생, 그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23. 이상
-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 이 질주의 나날
24. 안도현 그리고 정희성
- 관계, 그 여백과 간격
25. 신석정
- 꿈꾸던 유년을 다시 꿈꾸다
26. 장석남
- 바야흐로 시작되는 사랑
27. 윤동주
- 별 하나에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
28. 김소월
- 이별의 선행적(先行的) 체험
29. 김춘수
- 나도 제발 그녀에게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다
30. 작자미상
- 슬플 때일수록 경쾌한 노래로 풀어봐
31. 김영랑 ‘연1’
- 부교재 수업준비하다 문득
32. 조지훈
- 서른 살의 그녀가 떠난 8월 어느 새벽

2부
윤슬아빠의 뭉클한 소설, 책, 독서 그리고 노래 이야기

1. 황순원의 - 첫째 마당
- 에 빠진 중학생 소년
2. 황순원의 - 둘째마당
- 제목 ‘소나기’의 상징성
3. 황순원의 - 셋째마당
- 첫 만남
4. 황순원의 - 넷째마당
- 심상(心想)
5. 황순원의 - 다섯째 마당
- 짝사랑
6. 황순원의 - 여섯째 마당
- 사랑의 설렘
7. 황순원의 - 일곱째마당
- 배경의 절묘한 설정과 배치
8. 황순원의 - 여덟째마당
- 기다림과 그리움
9. 황순원의 - 아홉째마당
- 물의 소녀
10. 황순원의 - 마지막 마당
- 소녀의 죽음
11. 류시화
- 논술 수업과 함께 한 즐거운 여행
12. 미하일 엔데
- 청소부 철학자 배포 스승님께 바치는 짧은 헌사(獻詞)
13. 에리히 프롬
- 논술 수업 강의록 중에서
14. 아잔 브라흐마
- 고통과 슬픔을 지혜롭게 상대하는 법
15. 주제 사마라구
- 눈을 잃고 마음이 열리다
16. 신비한 리모컨
- 책읽기의 위로와 힘
17. 나는 책을 덮기 위해 읽는다
- 책 읽기의 깊고 오묘한 맛
18. 영화와 책
- 틈과 여백의 삶을 위하여
19. 영화 , 그리고 황순원의
- 상업 광고에 대한 비판과 감수성(感受性)에 대한 성찰
20. 영화
- 낯설고 가벼운 상상의 향연(饗宴)
21. 영화
-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
22. 영화
- 분위기,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
23. 영화
- 무섭도록 치열한 직업 정신
24. 영화
- 권태와 절망의 늪에서 피워낸 희망
25. 그리고 를 통해 가수 김광석이 준 인식
- 사랑하는 나의 딸과 아들에게
3부
윤슬아빠의 소소한 인생 이야기

1. 다시, 강의는 연극이다
- 좋은 강의와 수업에 대한 고민의 발자취
2. 7번국도 이야기
-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수업 중에
3. 시 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 날
- 시험 기간을 막 끝낸 어느 평일에
4. 생이불유 그리고 상선약수(上善若水)
- 노자의 도덕경에서
5. 인생이라는 저글링 게임
-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께
6. 기억의 원리
- 반복과 변주
7. 좋은 직장, 좋은 사회에 관한 고찰
- 수능에서 칸트의 글을 읽고
8. 유망이론
- 만족감과 행복의 기준
9. 가르침과 배움은 같다
- 제자 H의 질문 폭격에 허둥거리고 돌아온 날
10. 왼손의 경험과 오른손의 반응
- 힘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11. 분모의 크기에 따라
- 만족감의 능동적 조절법
12. 외계인 수업
- 첫수업에서 첫 제자 만나는 법
13. 소녀 어머니
- 어머니의 아픈 유년 시절
14. 껍데기는 가라!
- 알맹이 철학
15. 선유도(仙遊島)에서 보낸 70일
- 젊은 날의 방황과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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